블랙리스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공작정치이다. 지난 10월30일 국정원개혁위원회가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국정원은 ‘문예계 내 좌성향 세력 현황 및 고려사항’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15개 문화예술 단체와 249명의 문제 인물들을 작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검찰은 국정원이 박근혜의 문고리 3인방인 이재만, 안봉근에게 매월 현찰로 1억원을 상납했고, 조윤선, 현기환 전 정무수석에게는 500만원을 상납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재만, 안봉근은 상납받은 돈으로 지난 4·13 총선 동향을 파악하는 비공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이 돈이 모두 전직 국정원장의 특수활동비였다.

국정원이 작성한 15개 단체에 속한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이자, 특별관리 대상 249명에 속한 당사자로서 국정원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블랙리스트를 남한 최대의 공작정치로 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국정원은 블랙리스트를 자신의 세력 확장 수단으로 보았으며, 이 일련의 과정에서 청와대에 돈으로 로비를 했으며, 예술가들을 공작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블랙리스트라는 고리로 예술가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영혼을 짓밟았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재생산과 세력 확장을 위해 이용했다. 예술가들이 청와대와 국정원의 공작정치에 놀아난 것이다.

청와대와 국정원의 이해관계는 좌파예술가 색출과 퇴출을 위해 상호협조라는 명분에 기초하지만, 실제로 이 명분은 가설효과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게 나라를 위해 한 것이라는 이들의 공감대는 공작정치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가상의 신념에 기초한다. 그들은 이 신념을 동맹의 원천으로 생각하며 권력의 재생산을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블랙리스트는 그러한 공작정치의 동맹을 작동시키고, 생성케 하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 블랙리스트는 어떤 점에서 그들이 고안해 낸 공작정치의 훌륭한 신상품이며, 정치권력과 정보권력의 동맹을 확인시켜주는 일종의 리트머스 종이와 같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구국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이용하고,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기적 집단들이다. 국정원은 청와대에 돈을 상납하여, 부패한 공작정치에 면죄부를 받고자 했으며, 청와대는 국정원을 이용해 본인들이 해야 하는 정보공작의 임무를 부여했다.

김기춘이 작동시킨 블랙리스트는 유신 공안검사의 습관적 망상증의 결과이며, 이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망상증과 유사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권력의 정점에서 고영주와는 다르게 공작정치의 판을 크게 벌였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가 공작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국정원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들은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예술가 개인을 사찰할 수 있으며, 블랙리스트를 그럴듯한 구국의 미션으로 부풀릴 수 있다. 김기춘은 블랙리스트 작성의 정당성을 국정원의 공작 파일을 통해 얻고자 했고, 국정원은 청와대의 미션을 수행하면서 공작정치의 영역을 넓히는 수단으로 삼았다.

블랙리스트는 원래 인터넷에서 떠돌던 데이터베이스였다. 문재인, 박원순을 지지하고,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명단이었다. 그런데 이 명단이 김기춘, 국정원을 거치면서 블랙리스트가 되었다. 김기춘은 블랙리스트가 정책적 결정일 뿐 검열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국정원이 작성한 블랙리스트는 정치적 성향과 활동을 기준으로 배제와 퇴출을 적시한 명단이라는 점에서 검열이며, 청와대가 요청하고 국정원이 보고했다는 점에서 공작정치이다. 블랙리스트의 전달체계에서 수행 주체로 가담한 문체부의 전직 장차관들, 고위공무원들, 그리고 산하기관 간부들의 부역행위는 이러한 공작정치로서의 블랙리스트의 의미를 충분하게 간파할 때, 그 구조적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총력을 기울여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실체적 진상규명이 필요한 것은 바로 최고의 두 권력기관이 동맹해서 만든 공작정치가 돈과 정보와 권력으로 예술가들을 우롱했기 때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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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