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문제집을 풀고 있으면 어른들이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잘되어 가냐?” 그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찔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 안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탕하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잘되고 있지 않으면 걱정과 간섭이 주렁주렁 달릴 게 빤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만은 예외였다. 떡이나 빵, 과일을 건네주며 외할머니는 나직나직이 말씀하셨다. “할 만해?” 이 말이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기 힘든데도, 힘에 부치는데도 갑자기 할 만해지는 것 같았다.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나 자신이 중심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 길을 걷다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할 만해?” 선뜻 답하기 힘들었다.

‘만하다’라는 보조형용사에 대해 생각한다. ‘만하다’는 ‘어떤 대상이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할 타당한 이유를 가질 정도로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름 아닌 발화자의 평가가 들어간다는 얘기다. 가령, 식당에서 나올 때 하는 “먹을 만했다”는 말은 음식을 먹은 이의 만족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한 번이라면 먹을 만하다는 말도 되고 기회가 되면 앞으로도 먹을 것이라는 의지가 반영된 말이 될 수도 있다. 발화자의 말투, 억양, 성격 등이 ‘만함’이 미치는 범위를 결정한다. 믿을 만한 소식, 주목할 만한 작품 같은 표현도 신뢰와 지지를 표명한다는 점에서, 발화자 중심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만하다’는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한다. 외할머니가 내게 건넸던 “할 만해?”라는 질문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의 ‘만하다’는 개인의 주관적 평가보다는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면서 이 두 번째 ‘만하다’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오랜 친구들을 만났을 때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만 해도 그렇다. “살 만해?” “버틸 만해?” 가까운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할 만해?”라고 말을 건넸을 때 자기도 모르게 힘을 얻는 것처럼, 이때의 ‘만함’은 언제든 더 커질 수 있다. 매일매일 우리가 마주하는 숱한 싸움들은 일련의 ‘만함’을 통해 가까스로 이어지기도 한다. 덕분에 스스로와 타자와 사회와,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의 싸움은 계속될 수 있다.

시국이 어수선한 데다 문단 내 성폭행 사건까지 연일 터지면서 글을 쓸 의욕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꼭두각시 정권을 목도하며 어안이 벙벙했다. 정권에서 숨겨왔던 온갖 비리들이 앞다투어 까발려지는 것은 ‘눈 뜨고 볼 만한’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몸집이 점점 비대해졌다. 문단 내 성폭행은 결코 ‘참을 수 있을 만한’ 것이, ‘눈감고 넘어갈 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내가 ‘몰라도 되는 권리’를 누려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부끄러웠다. 사람이 저질렀다고는 믿기 힘든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혼자서는 미약한 목소리가 연대를 통해 힘을 얻고 ‘해볼 만한’ 싸움이 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다. 문학에 다음이 있다면, 다음의 문학이 있다면 아마도 이들이 그것을 이끌 것이다.

“쓸 만해?” 퇴근하고 돌아온 형이 컴퓨터 앞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말이 중의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 말은 ‘능력 있고 부리기 좋은’이란 뜻을 갖는다. ‘쓸 만한 인간’이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낳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문득 씁쓸해졌다. 쓸 만하지 않아서 나는 괴로웠고, 동시에 쓸 만하지 않아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애써도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괴롭지만, 이럴 때 글이 술술 쓰였다면 종래에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쓸 만한 인간’이라 인정받는 것보다 ‘살 만한 인생’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난 주말에 광화문에 갔다. 촛불을 켜고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는 점점 밝아지고 커졌다.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일을 기대해도 좋을 만한’ 광경이었다. 힘을 합치면 세력이 되듯이 ‘만하다’가 자꾸 모이면 충만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졸시 ‘아찔’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철옹성에 금이 가는 것을 보는 일은 경이롭다. 철옹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자꾸 물을 끼얹어야 한다. 사회에 만연한 차별, 위계에 의한 폭력과 부정부패 등 온갖 병폐들을 없애는 데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살 만한’ 세상이 온다. 겨우, 하지만 마침내 온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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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