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가는 여행길의 동대구역. 기차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따끈한 국물에 어울리는 생선을 비롯해 일찍이 대구에 자리 잡은 고향분들, 친구들이 떠오른다. 모두들 안녕하신가요? 하지만 이들도 이내 강력한 기억 하나에 밀려나고 만다. 아주 오래전 논산훈련소를 떠나 초라한 이등병의 신분으로 동대구역에 도착했던 것. 지금도 코끝에 걸려 있는 희붐한 새벽 공기 냄새! 오늘은 동대구역에 직접 내렸다. 달성군의 최정산으로 가는 꽃산행. 초행인 줄 알았는데 교통표지판을 보다가 퍼뜩 알아차렸다. 여기는 군대시절 입에 단내 나도록 훈련받던 가창유격장이 있던 곳이 아닌가.

이렇다 할 꽃이 없는 줄로 짐작했기에 임도를 따라 걸었다. 그냥 싱겁게 마무리를 하는가 싶었는데 호쾌하게 사방이 툭 트인 능선에 강한 바람을 맞으며 외롭게 서 있는 나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먼저 알아본 꽃동무의 외침이 귓전에 닿는 순간,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나무에 우열을 따질 수야 없겠지만 산에 들고나면서 꼭 보고 싶은 나무가 있었다. 움푹 파인 늪 같던 군대시절을 전후해서 내 허전한 옆구리를 지켜준 시집에 등장하는 나무.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라고 할 때의 그 나무. 갈매나무였다.

강화도 고려산에서 처음 본 이후 여러 차례 갈매나무를 만났다. 드물긴 해도 숲에 꼭꼭 숨어 있는 건 아니었다. 백석(白石)은 대체 어디에서 저런 나무를 보았을까. 내가 산에서 본 나무는 시에서 만난 것과 너무나 달랐다. 굳고 정하기는커녕 어쩐지 이등병같이 후줄그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정산 어느 바위 옆에 외로이 서 있는 나무는 이 지역의 전망을 한껏 휘어잡으며 굳건히 서 있지 않겠는가. 까맣게 익은 열매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단맛과는 아주 거리가 먼 애매하고 오묘한 맛이 일거에 입안을 장악했다. 오늘의 나를 배출한 여러 요소들이 우려낸 맛이라 생각하고 꿀꺽 삼켰다. 갈매나무, 갈매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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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