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도 아닌데 머리를 감고 나면 옥수수수염처럼 머리카락이 술술 빠져나왔다. 빠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비빈 다음 돌돌 말아 바구니에 모아둔다. 동전처럼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바구니가 넘쳐 뚜껑이 들썩일 때쯤이면 바늘꽂이도 만들고, 자질구레하게 솜 넣을 일이 있을 때 솜 대신 넣고 부자가 된 기분으로 열심히 머리카락을 모으며 몇 년이 지났다. 집 안 이곳저곳 솜 대신 도톰하게 머리카락으로 채워넣고, 이만하면 충분해하며 만족해할 때쯤 갱년기 탈모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됐다.

파마 안 하고, 술 담배 안 하는데 탈모라니? 불면증에, 식은땀에, 탈모에, 비만에…. 나이는 세월 가면 절로 느는 거라 알고 살았다. 나이는 훈장과 같아서 그냥 먹는 게 아니고 치르는 대가가 컸다.

강의 중에 흐르는 땀과 불쑥불쑥 얼굴은 달아오르고 좋아하던 커피 한 잔 마시면 이틀은 잠을 못 잤다.

나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함께 사는 직원 둘이 합이 들었다는 호랑이띠여서 서로 알콩달콩하며 죽이 잘 맞았다. 나는 내가 자랑스러울 때가 있어, 혼자서 땀 흘리고 열 내며 갱년기를 극복했잖아! 어느 부인은 너무 힘들어서 남편이 출근하는데도 내다보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있다는데 쯧, 정말 힘들었나봐 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호랑이띠 여인 둘이 얼굴을 마주보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갱년기 아니라도 남편 출근할 때 TV를 보면서 앉은 채로, 잘 갔다와 그래요! 그러면 남편이 오히려, 얼굴 좀 보자고 하지요. 뭐 별스럽게 갱년기라고 소파에 누워 있다고 그래요 참!” 둘이서 의기투합 합창을 했다.

갱년기 중에 겪는 이런저런 증상보다 호랑이띠 두 연인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하는 말이 더 충격이었다. 어느 여인은 힘들어서 일어날 기운이 없어, 소파에 누워 있었다는데 누구는 언제나 소파에 앉아서 맘 편하게 남편을 배웅할 수도 있는 거구나! 매일 앉아서 배웅하고 어쩌다 따라 나가 상냥하게 배웅하면 이벤트가 될 수도 있는 거구나. 같지만 다른 그 무엇은 무엇일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앉아서 남편을 배웅하는 호랑이띠 한 집은 매우 편안하다.

갱년기 여성 이미지 (출처 : 경향DB)


술 마시고 춤추는 버릇이 있어 가끔씩 남편에게 지적당하는 거 빼고는 집안은 평화롭고 아이들도 공부 잘하고 어디 한 군데 빈구석이 없다. 또 한 집은 남편이 건건사사 참견하고 적극적이어서 귀찮아하지만 사이가 좋다. 언제나 상냥했던 애인 같고 친구 같던 갱년기 증후군이 집을 점령하는 바람에 어둡다.

나는 어느 쪽일까? 남편이 출근하는 직업이 아니니 배웅할 일은 없다. 재택근무로 작곡하는 남편은 내가 출근할 때쯤이면 밤을 새우고 아침잠을 잔다. 밤새 친 피아노 페달 녹이 발바닥에 묻어 있는 걸 보고 깰세라 조용히 문 닫고, 출근했다. 아침밥은 밥상 위에 차려놓고 점심은 도시락 싸서 나란히 놓아두고 나온다. 이제는 일 많은 내가 서울서 살고 시골공기 좋아 밖에서 아이들 가르치며 사는 남편을 밤하늘 달보듯 보며 기찻길처럼 편안하게 살고 있다. 가끔씩 보는 남편은 친구 같고, 손님 같아 좋다. 따로 사는 남편은 아내가 넘어야 하는 갱년기 증후군이라는 산을 어떻게 넘었는지 모르고 지났다. 지금은 씩씩한 두 호랑이띠 여인들은 남편과 아이들과 먼저 겪은 이야기들로 미리 알고 쉬 넘으리라. 나는 내가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여인이면 넘어야 할 산을 혼자서 잘 넘었음으로 내가 나를 칭찬한다!


이효재 | 보자기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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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