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아에 대한 호오(好惡)를 떠나,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건 이상한 일이다. 메갈리아는 미러링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미러링에서 내용들은 그 자체로 실제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다.    

미러링은 그 가짜 상을 통해 은폐된 현실을 환기함으로써 사회적 토론을 만들어내는 소통방식이다. 메갈리아는 한국 남성의 성차별적 태도와 행동들을 거울에 비추어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그런 태도와 행동이 얼마나 일상적이며 뿌리 깊은지 환기하려 했다.

출처: 경향신문DB

오히려 메갈리아는 이른바 제대로 된, 건강한 페미니즘으로 보여선 안 된다. 페미니즘이라고 보기엔 지나쳐 보이는 것, 불편함과 거부감을 주는 것일 때 비로소 미러링의 효과가 생겨난다. 메갈리아의 일부 행태가 페미니즘의 범주를 넘는다는 비판은 싱거운 것이다. 메갈리아 미러링의 범주는 ‘한국 남성이 여성에게 한 적이 있는 모든 것’이다. 일베의 행태도 당연히 포함될 수 있다.            

그럼에도 문제 삼는다면 ‘감히 여자가 남자 하는 걸 다 하려 하는가’라는 말일 뿐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미러링이 아니라 진짜라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미러링이 미러링으로만 여겨질 거라면 뭣 하러 미러링을 하겠는가.

두 주류 성 안에서 메갈리아에 대한 반응은 대략 여섯가지로 나타난다.

1-① 페미니즘 반대 메갈리아 반대 남성.

1-②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반대 남성. 1-③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지지 남성. 2-① 페미니즘 반대 메갈리아 반대 여성. 2-②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반대 여성. 2-③ 페미니즘 지지 메갈리아 지지 여성.

메갈리아는 주로 2-③ 여성이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1-① 남성은 당연히 적대와 배제의 대상이다. 1-② 남성은 메갈리아를 빌미로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1-①과 다를 바 없는 남성으로 여겨진다. 1-③만 유일하게 개념을 가진 남성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들 역시 마냥 당당하긴 어렵다. 2-②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공통점은 미러링을 실제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미러링을 미러링으로 생각한다면 서로 그토록 화낼 일도 없었을 텐데 왜 다들 굳이 착각하는 걸까. 메갈리아조차 더는 그런 착각에 항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의 착각은 더 이상 착각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 봐야 한다. 왜 다들 착각할까가 아니라, 다들 착각해야 할 필요가 뭘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누구도 선뜻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실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 우리가 이미 우리 삶에 잔뜩 화가 나 있다는 것, 화를 낼 정당한 이유를 찾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미러링이 실제일 필요가 있다는 것.

우리는 왜 토론하는가. 한가지 옳음만 존재하는 사회가 가장 끔찍한 사회라는 걸 체험과 역사를 통해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 전적으로 옳은 사람들과 전적으로 그른 사람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옳음과 옳음의 조각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조각들을 모으고 합쳐서 좀 더 나은 사회와 삶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성가심과 고단함을 무릅쓰고 토론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민주주의라 부른다.

토론의 예의는 화를 내지 않고 평온함을 잃지 않는 것 따위에 있지 않다. 토론 예의는 토론의 기본을 지키는 데 있다. 토론의 기본은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내 의견에 모자람과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토론의 기본만 지킨다면 토론 과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이나 충돌은 서로 인간임을 확인하는 일일 수 있다.        

지금 우리의 토론엔 예의가 있는가. 우리의 토론은 오히려 무례를 기본으로 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일은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로, 내 의견에 모자람과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패거리를 짓는 일로 대체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토론 예의가 얼마나 더 망가질 수 있는지 경연하는 공간이다.

이런 상황이 모든 걸 더 나쁘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모두에게 나쁜 건 아니다. 이런 상황이 매우 유익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헬조선’에서 살게 된 덕에 지상 천국을 확보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래전 우리를 서로 빨갱이가 아닐까 의심하고 신고하게 만들어 유익했다. 우리가 그런 무지를 벗어난 다음엔 우리로 하여금 피 터지게 경쟁하게 만들어 유익했다. 그리고 우리가 경쟁의 결과가 헬조선일 뿐임을 깨닫고, 토론의 칼날이 드디어 저희를 향할 가능성이 보이자 짐짓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희색이 만면하다. 우리가 서로 벌레라 부르며 혐오의 수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혐오가 지배전략의 최정점임을 잘 안다.

이소룡 영화 <용쟁호투>엔 수천개의 거울로 만들어진 방 장면이 있다. 그 방에서 전투가 힘겨운 이유는 적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의 상들 속에 숨어 있다. 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나의 상을 한개씩 깨트려간다. 나를 발견해감으로써 적을 발견해간다. 우리는 지금 그런 방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왜 이미 내 삶에 화가 나 있는지, 내 삶을 그렇게 만든 건 과연 누구인지 비추어볼 때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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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