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추석 연휴를 보내다가 하릴없이 지난 달력을 들춰보니, 작년 10월29일 토요일이 광화문에서 제1차 촛불집회가 열린 날이다. 아직까지도 광장의 함성이 귀에 울리는 듯한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러버렸다. 금년 5월 새 정부가 들어서고 우리는 한없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북한 핵실험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긴장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고, 이곳 대학로는 매주 주말마다 태극기 집회로 떠들썩하며, 경제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조차 하기 싫은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미래를 위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있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흔히 하는 말이지만 다급한 일이 많다고 해서 중요한 일을 내팽개치면 언젠가는 큰 후환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크게 준비해야 할 일은 바로 헌법 개정이다. 그런데 대선 전까지는 5개 정당 모두가 공약으로 내세웠던 헌법 개정이 국정현안, 한반도 주변 정세 등 다른 사안들에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지난겨울의 촛불혁명은 우리 사회와 국가의 총체적 혁신을 바라는 강렬한 요구였다.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퇴진, 적폐청산이 전면에 있었지만 광화문 거리 이곳저곳 모인 군중들의 외침은 다양하고 폭넓었다. 군중의 외침에 담긴 강력한 메시지는 ‘대통령제를 포함한 정치체제를 혁신하자’ ‘검찰과 사법부 등 권력기관을 개혁하자’ ‘기본권을 보장해 사람답게 살자’ ‘안전한 국가를 만들자’ ‘국민의 주권을 강화하자’ ‘독점 재벌을 개혁하자’ ‘분권과 협치가 가능한 정부를 만들자’는 것 등등이었다. 군중의 외침은 총체적 변혁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수준의 변혁은 나라의 근본적인 틀, 즉 헌법을 바꾸지 않고는 달성될 수 없다.

정치권 일각에선 개헌을 선거제도 정도에 국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 국민이 달을 가리키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보는 격이다.

촛불혁명은 변혁의 중대 과제들과 더불어 변혁에 대한 접근방법도 제시했다. 촛불혁명을 토대로 한 변혁은 밑으로부터, 국민이 주도하는 변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촛불혁명이 우리에게 던진 과제는 국민주도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헌법 개정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개헌 장터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 규모나 움직임에서 매우 미흡해 보인다.

지금 헌법까지 개정할 필요가 있는가를 묻는 사람도 있다. 헌법은 국가사회를 작동시키는 근간으로 정치, 사회, 경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규정한다. 지금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새로운 동북아 국제관계의 형성 등 외부환경 변화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신세대의 진출, 급속한 인구 고령화, 외국인 노동자 급증, 가치관의 급속한 변화 등 내부환경 변화도 만만치 않다. 87년 체제를 만들어낸 현재의 50~60대와 촛불혁명을 만들어낸 현재 30~40대의 세계관과 철학이 아주 많이 다르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체제가 외부, 내부 환경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사례는 흔히 볼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에 가면, 낡은 국가체제와 국민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맞지 않아 조직이 잘 기능하지 못하고 삶이 왜곡되어 가는 것을 흔히 관찰할 수 있다. 국민은 시장경제체제로 한참 나아가 있는데, 시스템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사람과 시스템이 끊임없이 마찰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 헌법은 앞으로 30년 아니 50년을 내다보고 만들어야 한다.

정치권에 의하면 어떻게든 개헌은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촛불혁명이 제시한 중대 개혁과제들을 다루어내지 못하는 개헌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국력 소모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또한 그것은 촛불혁명이 모범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밑으로부터의, 국민주도에 의한 혁신이 되어야 한다.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회가 공정성, 전문성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고 해서, 국민주도적 접근 자체를 포기할 일은 아니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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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