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획자란 남들 앞에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직접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 필자, 독자, 출판 관계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를 구현해내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기획자는 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를 지향한다. 아무리 좋은 기획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줄 필자가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될 때가 있다. 얼마 전 편집회의에서 여러 안건을 두고 이야기하다가 너무나 멋진 기획을 만났지만,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하신 말씀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해서 글을 쓸 수 있는 필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지식인 중에는 자기 분야를 벗어나서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연구자들이 정말 드물어요. 또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럴 여력 자체가 없습니다.” 전문가(specialist)의 시대지만,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더욱 희소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1980년 한 해 동안 배출된 국내 박사 학위 소지자는 528명에 불과했지만, 2009년 1만명을 넘어섰고, 2015년에는 1만3077명에 이른다. 올해 태어날 신생아 수가 최초로 40만명 미만이 될 것이라 하니 인구는 줄어도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꾸준히 증가하는 셈이다. 인구 1만명당 박사 학위 취득자도 2명이 넘는다.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7%에 불과하며 고졸자의 대학 진학률은 80%에 육박한다. 수치와 통계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는 지식 선진사회, 바야흐로 대중지식인의 시대다. 그런데도 지식인 사회, 대학의 위기를 넘어 우리 사회가 반지성주의 사회가 되어간다는 우려가 들려온다.

역사학자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1963년에 펴낸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현대 지성사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그는 미국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복음주의’가 매카시즘이라는 ‘극우-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지식인, 특히 공적 지식인들을 어떻게 몰락시켰는지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복음주의, 극우-반공주의와 더불어 실용주의를 반지성주의의 핵심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지적 능력(intelligence)’과 ‘지성(intellect)’의 핵심적 차이는 실용성이 아니라 비판 능력에 있다. 지적 능력이 어떤 사안을 파악하고 처리하는 능력이라면, 지성은 의문을 품고, 이를 비판하고 이론화한다. 지적 능력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높은 자질로 평가되지만, 지성은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에 대해 호프스태터는 “지식인이란 해답을 질문으로 바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지식인은 사회적 통념과 상식에 의문을 던지는 불편한 존재란 뜻이다.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 사회는 대중의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은 국가권력의 정상화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를 달성한 결과이지만, 이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외면하고, 분단이라는 지속적인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 없이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우리는 스스로 정직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한가롭게 ‘선비질’이나 하는 존재로 비치기에 십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염려하게 된 이유의 상당 부분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살아오면서 권력과 야합하고, 금력에 굴복했던 지식인 자신에게 있다. 대통령 탄핵으로 귀결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뚜껑을 연 것이 이화여대의 미래라이프 사태와 정유라의 부정입학 사건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 사회가 처한 위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지식인이 없다면 적폐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과 싸울 때보다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스스로 더욱 외로운 소수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들의 비판과 의문이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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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