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흙수저(수저론) 등은 매우 급진적인 언어다. 한국이 봉건적 지옥이자 계급을 넘어 신분이 고착된 사회라는 뜻이니 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다는 80년대에도 그만 한 말은 드물었다. 이상한 일은 그 급진적 언어들을 우익 언론에서도 반감을 보이지 않고 동조한다는 것이다. 인정할 만한 사실이기 때문일까. 만일 한국 우익 언론이 그런 곳들이었다면 이미 존중받았을 것이다. 이유는 그 언어들이 매우 급진적이지만 전혀 불온하진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연대가 아니라 각자도생, 저항이 아니라 신세 한탄에 머물기 때문이다.

‘노력을 안 한다’고 호통치고 ‘청춘은 원래 아픈 거’라고 설레발치는 자칭 멘토들 앞에서, 청년들이 반성과 깨달음의 눈물을 흘리고, 없는 형편에 그들의 책까지 팔아주던 기막힌 풍경이 불과 한두 해 전이다. 나도 그즈음 이 지면에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할 일은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이라고 적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호통과 설레발에 대한 청년들의 반감이 팽배해지고 호통과 설레발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헬조선, 흙수저 같은 급진적 언어들이 등장했고 그에 동조하며 ‘미안해하는 얼굴’이 호통과 설레발의 자리를 차지했다. 외양은 매우 다르지만 역할은 같다.

그것은 민주화 이전까지 봄가을이면 방송과 일간지를 정기적으로 장식하던 ‘부유층의 사치행각’ 기사와 같은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하는데 일부 부유층은 골프니 해외여행이니 과소비에 열중하며 사치를 누린다’는 기사. 거기에 이따금 ‘부유층 2세들의 행각’이 부록으로 붙곤 했다. 그럼 ‘대다수 국민들’은 타락한 부유층과 ‘강남놈들’에게 혀를 끌끌 차며 하던 일을 열심히 했던 것이다. 일부 순진한 우익은 부유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자유시장 체제를 위협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기적인 기사들은 열심히 일하면 다 잘사는 사회가 온다는 거짓말을 더는 숨기기 어려운, 다수의 노력을 소수가 가로채는 사회로 가는 행로에서 일어나는 반감과 분노를 어르고 달래 차단하는 체제의 전략이었다.

그런 기사들은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보편화하고 ‘부자 되세요’가 모두의 덕담이 되면서 효용성을 잃는다. 헬조선, 흙수저 같은 급진적 언어에 대한 동조와 ‘미안해하는 얼굴’은 ‘부유층의 사치행각’ 기사의 30년 후 버전이다. 옛 동조가 여전히 전근대적 사회에서 자신을 국가의 일원으로만 여기던 사람들에게 맞춰진 것이었다면, 지금의 동조는 시민의식을 확보했으나 소비자 의식이 노동자 의식을 압도하는 사람들에게 맞춰진 것이다.



체제가 분노의 사회화를 차단하는 전통적이고도 세련된 방법은 분노를 뭉뚱그리는 것, 분노가 그 대상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날이 서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30년 전 타락한 부유층에 대한 반감이 그 매개였다면 지금은 ‘꿀세대론’이 그 역할을 한다. 기성세대가 청년일 때 경제가 지금보다 좀 더 역동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서 기성세대가 다 살기 좋았던 건 전혀 아니다. 이를테면 ‘그 시절엔 대학만 나오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을 살펴보자. 80년대 중반까지 대학진학률은 채 20퍼센트가 못 되었다. 대학 나온 사람이 다섯명 중 하나가 안되니 대학을 나오면 일자리 구하기가 수월한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당시 대학을 못 간 사람들이 치러야 했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다섯 중 하나도 안되면서도 또래 사람을 만나면 으레 ‘학번’을 묻는 그 세대 엘리트의 뒤틀린 정서와 대학은 누구나 가는 거라 생각하는 현재 정서가 묘하게 결합해 만들어낸 착각이자 기만이다. 헬조선의 요체는 세대 문제가 아니라 극심한 계급적 양극화, 즉 1퍼센트의 몫을 무한정 늘리기 위해 90퍼센트의 몫을 줄이는 공정에 있다. 다루기 어려운 조직노동보다 미조직 노동 부분이 더 쉬운 먹이가 될 수밖에 없고 청년들은 대부분 그에 해당한다. 비정규 불안전 노동 상태에 있는 기성세대의 형편이 청년들보다 결코 낫지 않다는 건 그 사실을 방증한다. 청년들이라고 해서 다 흙수저는 아니라는 사실도.

헬조선, 흙수저 같은 급진적 언어들은 노력해도 안되는 사회에서 ‘노오력하라’는 호통과 설레발에 대한 반감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노력해도 안되는 사회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력하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체제는 청년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걸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래서 급진적 언어들에 교활하게 동조하며 짐짓 미안한 얼굴로 ‘그래 그래 노력해도 안되지. 헬조선 흙수저 맞는 말이지’ 한다.

변화는 청년들이 저항할 때, 교활한 동조를 거부하고 세상을 뒤집어엎겠다고 나설 때 시작된다. 이렇게 말하면 즉각 ‘지금 청년들 형편에 어떻게 저항씩이나 할 수 있단 말이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교활한 동조의 좌익 버전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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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