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도보다리가 분단의 38선을 단숨에 지웠습니다. 우발적인 오보로 베를린 장벽이 하룻밤 만에 무너졌듯 남북의 70년 장벽도 한번에 허물어지려나요.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쌓인 그리움에 간절한 염원이 보태져야겠지요. 어떤 순간이 벼락처럼 왔을 때 다 함께 달려나가 허물어뜨리려면 말입니다.

이런 설렘쯤은 괜찮을 줄 알았던 계절, 전 어제 밤새 뒤척였습니다. 당신과 긴 통화를 한 뒤였지요. 어두운 목소리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더군요. “여성 후배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해서….” 더불어민주당 6·13 지방선거 경선을 넘지 못한 당신의 소회는 차라리 눈물이었습니다. 사실 남성들에 견줘 돈도 조직도 경험도 많지 않은 여성들에 ‘마을 정치’는 쉽지 않지요. 골목을 장악한 세력들의 굳건한 동맹. 오죽하면 “남성 의원들은 낮에 의회에선 꼼짝 못하다가 밤에 동네로 나오면 활개치더라”는 경험치가 때만 되면 나올까요. 차라리 총선은 바람(시대정신, 중앙정치)에라도 기댈 수 있지요. 내심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 후보들의 도약을 기대했습니다. 기존 ‘변명’이 통하지 않는 환경 때문입니다. 미투(#MeToo) 운동의 불씨를 성평등 정치로 살릴 수 있는 적기였지요.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앞장설 거라 확신했답니다. 이번처럼 승리를 낙관한 적도 없었기에 본선 경쟁력 구호에 밀렸던 여성들이 이제 어깨 펴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공천 결과는 강력한 백래시였습니다.

17개 광역단체장 후보 전원이 남성이라니, 좀 과장하면 소름 돋았습니다. 기초단체장, 광역·기초의원 경선도 여성에겐 무덤이었습니다. 들여다보니 지독한 내전이었더군요. 지방선거가 차기 총선을 앞둔 지역위원장(지역구 국회의원)들의 담합 무대나 다름없었습니다. 민주당 승리 예보는 내전을 부추기는 무기였습니다. “권리당원 2000여명을 입당시켰지만 투표를 못한 사람이 많았다. 알아 봤더니 ‘서류 입력을 잘못해서 당원 명부에서 빠졌다. 당비 줄 테니 받아가라’ 했다고 한다.” 지역위원장들이 본인 지지자들만 관리했을 뿐 경쟁자 측 권리당원은 방치했다는 하소연입니다. 권리당원 비중이 공천의 절대 변수였던 경선에서 지역위원장이 밀지 않은 예비후보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요. “지역위원장이 ‘나는 (광역·기초단체장으로) ○○○ 후보를 지지한다. 지지자 명단을 달라’고 하더라. 지역위원장과 내가 미는 후보가 다르면 가번이 절실한 내 입장에선 지역위원장 눈치를 보게 된다.” 큰 단위부터 결정하는 공천 방식이 지역위원장들의 입김을 강화하는 기제가 된 거지요. 민주당이 기초의원 4인 선거구제 무산에 집착했던 이유가 짐작되지 않습니까.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입니다. ‘내전’이 심각했던 민주당 경선만 해도 여성 전략공천, 여성할당제가 여성혐오 공천으로 변질됐습니다. “여성 30% 공천 원칙이 있지만 2인 선거구에선 여성 한 명 뽑으면 50% 공천이라는 이유로 안 지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 전략공천 약속을 지키라고 했더니 ‘페미질’, ‘메갈후보’라는 욕설이 쇄도했다.” 미투운동, 정당 정치 폐해가 얽혀 남성 약자들이 더 약자인 여성을 노골적으로 공격한 현상입니다. 이 와중에 여성 할당제·전략공천, 가산점 제도 취지도 훼손되더군요. 하나 같이 여성 과소대표성을 교정하기 위한 조치 아닙니까. 저, 설득과 대응에 진이 빠졌습니다. 여성 인재가 많아지면 뭐합니까. 당선 가능성 낮은 지역에 몰아버리는데요. 경쟁력을 갖추면 또 뭐합니까. 컷오프로 뒤통수치는데요. ‘가산점 받고도 떨어지는 능력없는 여성들에게 웬 특혜냐’고 몰아붙입니다. 아니, 남성들의 능력이 대단해서 정치가 지금 이 지경인가요. 능력과 경쟁력은 왜 여성에게 더 가혹한 기준이 돼야 하나요. 여성 할당제·전략공천은 특혜가 아닌 방향이라고 이해합니다. 성평등 정치라는 큰 방향 말입니다. 이마저도 동의 못하면 왜 지역에서 여성들이 성장 못하는지, 민주당 부산 사례(비례의원만 있다가 이번엔 기초단체장 여성 후보 2명)만 보더라도 그간 준비된 여성들이 왜 무대에 못 올랐는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 리더들의 책임감도 필요합니다. 여성 국회의원들은 총선 때 30% 의무공천엔 사활을 걸면서 정작 지방선거 때는 내 문제라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5·18 가두방송 주역 김선옥씨가 고문 수사관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말을 38년 만에 꺼냈습니다. 86도, 운동권도 아니어서 홀로 견뎠을 모진 세월을 헤아리니 너무 가슴 아픕니다. 분노가 치밀지만 이제라도 용기를 내서 고맙습니다. 성평등 정치는 이런 일을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지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배지를 달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란 걸 확신하게 됩니다.

역사의 반쪽 서사는 곧 온전한 하나로 채워지겠지요. 정치의 반쪽 서사는 언제쯤 제 짝을 찾을까요. 압니다. 질 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피는 꽃의 다른 이름은 상처란 걸요. 꽃일 때보다 상처인 때가 많았던 당신. 여기저기 긁힌 상처로 정치의 38선을 넘는 당신에게, 간절한 염원을 담은 도보다리가 돼 드리겠습니다.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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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