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가방을 둘러멘 여자아이가 숨 가쁘게 달려오다 내 옆에서 걸음을 늦추며 숨을 몰아쉬었다. 미술 학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영어, 중국어, 피아노, 발레 학원도 다닌다길래 힘들지 않으냐고 묻고 보니 머쓱했다. 어른들은 선행 학습을 하지 않으면, 남다른 것을 하나라도 더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며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내몰았고, 아이들은 그 두려움이 진실이라고 믿은 지 오래되었다.

우리 사회의 사교육은 복된 미래를 줄지 모르는 토테미즘이다. 제단 앞에 바치는 양에게는 어떤 기대도 없이 오로지 신의 전지전능함만을 바랐던 이들처럼 어른들은 불안할 적마다 보다 용한 선생과 밝은 앞날을 보장하겠다는 학원을 찾아 나선다.

오늘은 미술 학원, 내일은 피아노 학원과 중국어 학원에 가야 한다는 아홉 살 아이도 이미 그 두려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힘들지 않으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의젓하게 대꾸했다.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런데 중국어 학원은 다 3, 4학년이에요. 2학년은 저밖에 없어요.”

아이 표정을 봐서는 언니 오빠들과 나란히 공부하는 게 자랑스럽다는 것인지, 나이 먹은 이들을 따라잡는 게 어디 쉽겠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토요일에는 발레 하나만 해도 돼요.”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빙긋 웃었다. 마치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는 듯. 나는 앞서 걸어나가는 아이의 뒤꽁무니를 쫓으면서, 블라인드 채용으로 불안감에 휩싸인 취업준비생들 중에는 승마나 펜싱을 배우는 이들이 있다는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그 기사를 본 누군가는 요즘 출퇴근할 때 말을 타냐면서 객쩍은 소리를 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란 것을. 말도 좀 탄다고 하면, 칼도 좀 휘두를 줄 안다고 하면 아니 두려움에 그 정도 비용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면 생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믿어준 적 없는 사회에서 자신을 믿어본 적 없는 이들은 믿음을 사려고 값을 치러야 한다. 바삐 걷는 아홉 살 아이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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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