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깨비의 코

새앙쥐의 코

메추리의 코

그 작은 코 보셨습니까?

 

뜸부기의 입

뻐꾸기의 입

종달이의 입

그 작은 입 보셨습니까?

 

비가 오면 이 작은 것들도

비에 젖습디다

방아깨비의 코

뻐꾸기의 입

 

(표현의 엄밀성, 그러니까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엄밀성을 기술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이 시가 씌어진 날은 내가 공허로 공치는 날.)

 

비오는 날, 비가 오면

내 작은 눈, 입, 코, 귀도 비에 젖습디다.

눈 위에 빗방울, 코 위에 빗방울.

 - 오규원(1941~2007)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방아깨비에게도 코가 있을까. 숨 쉬려면 코가 있어야겠지. 그러나 누가 그 사소한 게 궁금하다고 들여다보기나 할까. 방아깨비는 코가 있어도 없는 거나 다름없다.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것,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인간 말고는, 인간이 이용하는 물건 말고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있으나마나 한 것이 감히 존재하려 하다니, 방아깨비의 코는 참 무례하구나.

하지만 비가 오면 사람만 맞는가? 인간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비조차 맞지 않는가? 아무리 볼품없고 쓸모없는 것이라도 비를 맞는다는 사실,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만이, 세상을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고 유용한 것만 보려는 인간만이,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할 뿐이다. 눈앞에 두고도 안 보이는 것, 눈앞에 있는데도 못 보는 것, 이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가 필요하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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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