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직업환경의학 의사이다. 유해물질을 다루는 노동자에 대한 특수건강진단을 하고 있다. 출장검진을 하러 사업장을 방문하면 보통 10분 정도 미리 사업장 유해물질 관리실태를 살펴본다. 지난주에 방문한 사업장은 자동차 부품공장인데 공장 한쪽에 드럼통이 있었고, 화학물질이 들어있는 드럼통은 화학물질을 나누어 담기 편하도록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선반 작업을 하는 작업자에게 물었다. 무슨 물질인지 알지 못하고 CNC선반 작업을 하는 데 사용한다고 했다. 냄새를 맡으면 어지럽다는 얘기를 했지만 건강상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보관된 장소 주변에는 물질안전보건자료가 게시되어 있지 않았다.

물질안전보건자료란 화학물질의 특성, 건강상 유해성, 보관방법, 사고 시 대처방법 등이 기재되어 있는 서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화학물질 공급업자가 구입자에게 제공하고 해당 화학물질의 용기에 경고 표지를 부착해야 한다. 해당 화학물질을 제공받은 사업장은 이 자료를 사업장에 근무하는 노동자가 볼 수 있도록 비치하고 보건담당자는 해당 화학물질을 다루는 노동자에게 교육도 실시하여야 한다.

2005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23세 여성인 황유미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1년 후 같은 공정에서 근무하던 이숙영씨도 백혈병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황유미씨가 근무한 공정에서 역학조사를 실시했지만 원인 물질은 알 수 없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업비밀이라는 명분으로, 사용된 화학물질의 성분 및 특성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업비밀은 산재인정 시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반도체 팹 공정에서 사용하는 어떤 화학물질의 물질안전보건자료에는 7~17%의 성분이 영업비밀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업비밀인 성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관리도 할 수 없다. 사업주는 노동자가 다루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알권리를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전문가들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노출되는지 측정할 수도 없고, 건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평가하고 조치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앞으로 반도체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자연유산하거나 암이 발생하더라도 그 원인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상 영업비밀로 분류할 수 있는 주체는 화학물질을 양도, 제공하는 사업자이고 구체적인 범위는 고용노동부령에 위임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령에는 영업비밀로 분류되는 사유를 물질안전보건자료에 밝혀야 한다고만 돼있어, 화학물질을 제공하는 사업자가 영업비밀로 판단하면 영업비밀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제도상의 허점을 해결하고자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물질안전보건자료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최근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 반영되었다. 사전심사제도란 화학물질을 양도·제공하는 사업자가 물질을 제조함에 있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 공개될 경우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을 기업이 입증하라는 것이다. 유럽과 캐나다·미국·일본에서 사전심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해당국가 다국적기업도 이미 받아들여 사회적으로 정착된 제도이다.

그런데 경총은 이 개정안을 반대하는 공식의견서를 국무총리실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더 이상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 글을 쓴다. 이 개정안은 노동자뿐 아니라 시민의 건강보호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가습기 살균제의 성분도 영업비밀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기업들이 화학물질을 영업비밀로 하는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이다. 하루빨리 사전심사제도를 도입해서 노동자와 국민이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권리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노동부는 법개정에 그치지 않고 모든 작업현장에서 노동자가 취급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가 비치, 게시, 교육될 수 있도록 근로감독을 강화할 것을 촉구한다.

<방예원 |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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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