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산성에 갇혔고, 역사는 굴종을 기록했다. 1636년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의 치욕적 역사를 보여준다. 쓰러져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떠오르는 청나라와의 실리 외교를 압도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불과 40여년 후, 조선 민중은 또다시 외세의 침략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왕과 봉건 지배층의 무능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백성들은 또다시 ‘오랑캐’의 발굽에 짓밟혔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역사는 굴종을 기록했지만, 영화는 치욕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의 지배계급이 자초한 이 굴욕의 역사를 이른바 ‘객관적 시각’으로 묘사한다. 척화파 김상헌도, 주화파 최명길도 모두 자기 나름대로 할 말은 있다는 식이다. 김훈의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 묘사는 영화의 사실성을 높여주긴 한다. 전쟁과 평화 사이의 긴박한 대립 구도 속에서, 서로 마주치는 세력과 인물들을 중립적이면서도 다면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속에서 김윤석의 단호함과 이병헌의 절절함은 불꽃 튀는 말과 논리의 향연이다. 여기에 박해일이 연기한 인조 임금 역시 비굴하고 무책임한 캐릭터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누구의 편에서 역사를 사유하는가? 역사의 객관적 기록과 영화의 상상적 진실은 다른 문제이다. 원작 소설가 김훈도, 영화감독 황동혁도 모두 대답을 회피한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으로 독자와 관객의 몫이다. 다만, 영화 <남한산성>이 문제의 본질을 반쯤 가리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인조를 비롯하여 김상헌, 최명길 등 당시의 봉건 관료들은 광해군의 개혁정치와 자주적 중립 외교를 무너뜨린 반란의 주역들이었다. 척화파든 주화파든 사실은 썩어가는 조선의 봉건 왕정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층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장장이 ‘날쇠’(고수)와 부모 잃은 어린아이 ‘나루’(조아인)의 캐릭터가 주변인처럼 겉돌고 있다는 사실은 아쉽다. 근왕병을 요청하는 날쇠의 활약은 허무하게 좌절된다. 나루는 그저 순진함과 귀여움의 캐릭터로 소진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조는 왕궁으로 돌아오고, 날쇠와 나루는 대장간으로 돌아간다. 비굴한 왕은 권좌를 유지하고, ‘무지렁이’ 백성들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엔딩신은 그 의도와 달리, 역사적 패배의식과 냉소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역사 영화는 과거를 현재화한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맥락에서 소환된다. 영화 <남한산성>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과 겹쳐진다. 400여년 전, 조선의 사대주의 정책은 명나라에 대한 군신의 의리와 명분에 집착했다. 새로이 대륙의 주인으로 떠오른 청나라에 대해서는 무지와 무시로 일관했다. 실리적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던 광해군의 의지는 인조반정으로 무너졌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조선의 봉건 지배층은 외세의 힘 앞에 철저히 농락당했다.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도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쪼갰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고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를 외치면서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과 맞서고 있다. 한반도는 여전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넘어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작가 한강이 말했듯이,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이른바 ‘한·미동맹’의 깃발 아래 강행된 사드 배치로 인해 중국 무역에서 이미 8조5000억원의 경제 손실이 발생했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편향된 정책은 미국 군수업체들의 무기 장사에 휘둘릴 뿐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주변 강대국들의 힘 관계를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미국과 일본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실리적 등거리 외교와 자주적 중립 노선이 절실하다. 이것이 400년의 세월을 건너 영화 <남한산성>이 던져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정헌 중부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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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