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가는 것일까. 달아나는 정유년을 압침으로 눌러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집어든 묵직한 책이 <비글호 항해기>였다.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지만 최근 주말마다 오르는 산에서 마주치는 풍경의 한 자락을 집으로 운반해 온 탓인가. 낯선 동식물이 자주 출몰하는 가운데 이런 유의 문장들에 마음이 축축해졌다. “2월29일 브라질에 도착해 난생처음 열대 숲을 거니는 자연사학자는 우아한 초원, 진기한 기생식물, 아름다운 꽃, 반짝이는 초록 잎,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성하게 우거진 숲 전체에 흠뻑 매료된다.”

어쨌든 오늘의 하루도 그때의 하루와 꼭 같은 분량의 시간이다. 비글호가 갈라파고스를 향해 나아가듯 팔 저어 거인의 어깨 같은 태백의 덕항산을 오를 때 저자의 저런 느낌에 나를 포개기도 하였다.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인 곳. 그곳에서 그것들의 너머를 힐끗 보려고 한다만 그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삐딱한 경사에서 상태가 환한 꽃이거나 묘한 처지에 놓인 나무의 사연을 줍느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나에게 걸려든 것은 초원도, 기생식물도, 꽃도, 잎도, 숲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좀 더 생각을 전개해 본다. 흔히 자연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는 일면의 진실일 뿐 완전히 옳은 말은 아니다. 눈앞의 세계는 보여주는 빛과 보여지는 사물이 팽팽하게 만나서 빚어내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물체가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면 직진하는 빛은 모조리 직선이라서 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세상의 절반은 직선이 아닐까.

지금 내가 빠져드는 곳은 접시처럼 매끈한 참싸리의 잎에 얹힌 꽃 그림자 속이다.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는 바람에 따라 춤을 추기도 했지만 내 동작에 따라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래도 어쨌든 그림자의 주인은 기름나물. 산형과의 식물로 잘게 갈라지는 잎과 가느다란 가지가 곧고 길게 뻗는다. 그리고 그 끝에 우산처럼 모여서 달리는 자잘한 흰 꽃잎들. 평행한 햇살이 만드는 정교한 기름나물의 그림자 속으로 오늘의 내 그림자도 감쪽같이 흘러나가는 듯! 기름나물,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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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