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전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아마 안녕할 수도, 안녕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2010년 안태근 전 검사가 장례식장에서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이를 법무부에서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건’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조사를 벌이고 있으니까요. 조사단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L 전 장관님도 조사 대상이라고 밝혔습니다. 조사단에 출석하는 일이 번거롭고 성가시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8년 전 당신을 수행하던 안태근 전 검사가 후배 검사를 성추행하던 그 시간과 장소에서 L 전 장관님은 무엇을 보고 들으셨는지요. “내가 이놈을 수행하는 건지 이놈이 나를 수행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신 발언은 무슨 뜻이었는지요. 아마 조사단에서 답변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안녕할 수도 있습니다. 성폭력 사건에서 지금까지 안녕하지 못했던 쪽은 주로 피해자였으며, 안녕했던 쪽은 가해자였으니까요. 하물며 일개 ‘목격자’에 불과한 당신의 안녕 여부에 이 사건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겠군요.

목격자에 불과한 당신을 수신인으로 하는 이 글이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때로 아무런 일도 안 하는 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당신은 법무부 장관으로서, 검찰 선배로서 후배 검사가 강제추행을 당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성추행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동안 법무부를 총괄하는 장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눈감고 귀 막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안 전 검사가 성추행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멸감과 수치심, 혼란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서 검사의 모습과 그가 속으로 내지르던 비명이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검찰 조직 내의 만연한 성폭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요. 그저 술자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흔한 풍경’ 중 하나로 특별할 것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8년 전 그 자리에서 당신이 한마디만 했더라면, 성추행을 제지했다면, 백번 양보해 성추행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그 이후 문제가 됐을 때 가해자를 확실히 문책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침묵은 서 검사에게 성추행으로 인한 고통에 더해 인사 불이익이라는 ‘2차 가해’를 했습니다. 나아가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줬습니다. 법무행정을 담당하는 부처의 수장이 함께한 자리에서 버젓이 성추행이 이뤄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와 법제도가 얼마나 성폭력에 무감각한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죠. 당신은 어쩌면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지워오는 데 가장 앞장서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당신만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장관으로 임명한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성 비하적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습니다. “마사지걸을 고를 때 얼굴이 덜 예쁜 여자를 골라야 서비스가 좋다”는 이른바 ‘마사지걸 발언’ 등으로 여성단체가 주는 ‘꿰매고 싶은 입’ 상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통령에 그 장관’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문화계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학계의 대표 시인, 영화계의 대표 감독이 성추행과 폭력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러니 이 글의 수신인은 당신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수많은 남성, 성폭력을 방조하고 묵인한 사회 구조이기도 합니다.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파괴되고 무너진 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이번만은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진실’을 외쳐온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거센 물살이 되어 조금씩 둑을 무너뜨리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말하기를 멈춘 적 없는 여성들은 계속 외칠 것입니다. 정말 세상이 터져버릴 때까지.

<토요판팀 | 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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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