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던 사이도 아닌데, 사실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데…, 문득문득 말을 건네고 싶은 친구가 있다. “잘 지내고 있죠? 어디서든 씩씩하게,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그러다 문득 걱정이 되어 그의 최신 안부를 찾아 인터넷을 뒤적인다. ‘김예슬 선언, 그 이후’라고 검색어를 넣고 이것저것 클릭해서 읽다가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는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고려대 정문 앞에서 ‘대학 거부 선언’ 1인 시위를 벌였던 김예슬. 그는 현재 비영리 사회단체 ‘나눔문화’ 연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 <용기 있는 작은 돌멩이들의 외침, 김예슬 선언> 7쇄 인쇄 중.”

기쁜 일이다. 처음엔 너무도 뜨거웠지만 금방 잊혀질까 봐 걱정했더랬다. 나도 그 책을 읽었으니까.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선언 아래 담긴 스물다섯 살 여대생의 글들이 얼마나 칼날같이 예리하게 메아리치던지 한동안 가슴이 아픈 가운데 어디선가 둥둥둥 북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 ‘친구들을 넘어뜨리고 제치며 기뻐하는 우수한 경주마’로 살았다고 고백한 그녀였다. 그랬을 거다. 이름하여 SKY에, 그것도 최고 인기학과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그녀가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 앞에서 ‘이제 아무리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며 기업을 위한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피 끓는 청춘답게 되바라진 용기를 봤나? 책 속에서만 본, 진정 젊은이다운 용기였다.

예컨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체벌이 일상화된 교육현장에 염증을 느끼고 곧바로 그만둔 젊은 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야기…. 미국 정부가 흑인 노예제도와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 전쟁까지 일으켰다는 이유로 세금 내기를 거부했던 그가 아닌가? 그 때문에 감옥에 갔고 감옥에서 나와 <시민불복종> 선언을 썼던 그다.




난 김예슬 선언이 소로의 책처럼 우리 시대의 혁명적 고전이 되어 두고두고 읽히길 바랐다. 그래서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그 작은 책을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책을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조카에게 보내는 선물 봉투에 편지와 함께 넣어 보냈다.

너무 빠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조카 경서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미 자기만의 비전을 가지고 사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긴 매우 신기한 아이가 아니던가? 처음엔 무슨 아이돌 밴드를 좀 과하게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초등학생이 팬 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자신과 같은 또래 팬들이 주문하는 스티커 상품까지 만들어 팔았다. 그 일 때문에 초등학생이 새벽까지 코피를 쏟으며 철야 작업을 하고 심지어 동생에게 아르바이트를 시킨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웃었다. 그러자 바쁜 언니를 돕고 있는 그 여동생이 이렇게 말했다.

“고모, 웃지 마세요. 언니는 나름 심각해요. 처음엔 아빠 혼자 너무 고생하신다고 자기도 돈을 벌어서 보탬이 되겠다고 시작한 거예요. 근데 벌써 1년째 주문이 계속 밀려 있어서 이제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대요. 고객과의 약속 때문에….”

그랬던 아이다. 각종 상하수도 설비는 기본이고 전기 공사, 방수 공사, 겨울철 동파 해결, 막힌 변기 뚫기 등 집수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존경스러울 정도로 성심껏 다루는 아빠를 사랑해서 밤이면 그 아빠의 발을 닦아주던 아이. 생긴 건 또 얼마나 예쁜지 배우 고현정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아니다. 솔직히 대충 해도 잘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얼마 전 이렇게 선언하더란다.

“나 대학 안 갈래. 그거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대학 가야 훌륭하고 안 간다고 안 훌륭해지는 거 아니잖아. 아빠도 대학 안 나왔지만 훌륭하잖아. 대학 갈 돈으로 일찍 내 사업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 돈으로 가족 여행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리하여 지금 그 가족이 장인과 장모, 처제에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지금 제주도에 있다. 제주도에서 내가 쓴 편지와 김예슬의 책을 다 같이 돌려 읽으며 회의 중일 것이다. 대학에 안 가겠다는 딸의 선언을 벌써부터 지지하고 응원하는 철부지 고모의 편지와 책을 본인에게 과연 줘도 될지, 안 될지.

우리 엄마 말이 그렇다. “너는 대학 나왔기 때문에 결코 알 수 없는 게 있어. 대학으로 신분을 가르는 이 한국 사회에서는.” 맞는 말이다. 따라서 난 내 편지와 김예슬의 책이 조카에게 전달되지 않아도 결코 속상해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늘 응원할 듯하다. 자기 생각과 의지가 분명한 내 조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과 보호 아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삶을 살든. 다만 김예슬과 그의 어린 후예들에게 전한다.

인간다운 삶의 빛을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당신은 이미 누구보다 강하다고. 처음에는 이런저런 그늘 아래 있겠지만, 그게 필수일 터이지만 결국 그 빛을 찾게 될 거라고. 당신을 당신만의 별로 인도하는 용기의 빛. 그러니 모두 힘을 내어 전진하자고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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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