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지난 10월26일 한국인문학총연합회가 창립기념 행사를 가졌다. 이 연합회는 인문학 관계 학회들을 하나의 모임으로 엮어 보자는 것이다. 사실의 면밀한 조사 검토가 학문의 기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연구는 그 연구대상에 따라서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분과적인 학문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도 학문 연구의 중요한 과제이다. 학문은 궁극적으로 세계와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또 하나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 기획이다. 이번에 출발하는 연합회 구성에는 26개의 학회가 참가하였다.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등록된 학술단체는 2011년 현재 7621개에 이른다. 쪼개져 나간 학회들을 연합하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할 것이다.


발표된 ‘인문학 선언문’은, “인문학은 인간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서, 과학조차 이 이야기의 일부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학문이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지만, 세계와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학문의 최종 목표의 하나인 것은 틀림이 없다. 지난번의 본 칼럼에서 한국 과학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를 소개하면서 필자가 지적한 것도 그러한 종합의 필요였다. 한편으로 종합은 장기적인 과학 발전을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 그 인간 복지에의 수렴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문학이나 철학의 반성적 사고에, 물론 더욱 넓혀서, 종합적 인문적 사고에 열리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경향신문DB)


그러나 단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쓸데없는 일일 수 있다. 인문학총연합회의 토론회에서 건국대의 성태용 교수는 “인문학, 쓸모 있다고 말하지 말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발표문의 요지는 유용한 것만을 찾는 세상에서 인문학은 절로 무용지물로 보일 수밖에 없는데, 쓸모가 없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것을 확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역설을 포함하는 주장이다. 성 교수는 어떤 나무가 쓸모가 없었기에 큰 그늘을 제공해주는 나무로 자라게 되었다는 장자의 우화를 인용하여, “쓸모없음의 큰 쓸모(無用之大用)”를 언급하였다. 성 교수의 정의에 의하면, 인문학은 쓸모가 없는 듯하면서, “성숙한 삶을 살게 해주는 학문”이다.


미국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낸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의 글에는 성 교수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쓸모없는 것의 쓸모”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는 이 제목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쓸모없는 이론들에서 나온 발명들을 예로 들고 있다. 1939년에 쓰인 글이기 때문에 오래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맥스웰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쓸모없는 이론이 마르코니의 무선 통신과 같은 쓸모 있는 발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러한 것이 과학과 기술의 우회적인 연계의 예가 된다.


그렇다고 큰 쓸모가 나올 것을 기다려, 쓸모없는 것을 참고 너그럽게 보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학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자유로운 인간 정신이라는 점이다. 학문은 그 자체로써 삶의 보람을 이룬다. 이것은 과학에도 해당되지만, 시나 음악이나 그림 또는 다른 인문적 탐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것 없이 스스로 즐거운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학문은 실용에 봉사한다. “증오가 휩쓸고 있는 세계에서도 사람은 ‘이득이 있든 없든’ 아름다움을 함양하고 지식을 쌓고 병을 고치고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는 일”을 한다. 물론 사회 경제 정치의 실제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일도 학문이 할 수 있는 일의 하나이다. 다만 그러한 실용적 기능은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플렉스너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유로운 정신을 존중하면서 고등과학원을 운영하고 아인슈타인, 수학자 헤르만 바일이나 폰노이만, 미술이론가 파놉스키 등의 자유로운 학문 생활을 뒷받침했다.


지금은 이러한 자유로운 학문의 이상은 미국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무용(無用)과 대용(大用)은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서로 넘나들게 마련이다. 급한 쓸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쓸모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문제를 초연하게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거리를 두고 보아야 넓은 지평 안에서 해답의 여러 가능성을 찾아내고 문제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사람을 구할 때도, 급한 가운데에도 느긋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자격 요건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을 쉽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학문의 사명은 사회적으로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게 하는 지적 자산의 축적에 기여하고 그것을 일반적인 문화가 되게 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학계의 인사들이 후보자의 소위 ‘캠프’에 참여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다. 요즘에는 급한 현실 속의 발언만이 학문하는 자의 눈에 띄는 의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보다 넓은 정신의 자유로운 탐구의 자율 구역도 그렇게 정의되는 쓸모에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제민주화’는 이번 선거에서 핵심 안건으로 등장한 정책 지표이다. 그 방법 그리고 현실 요건의 관점에서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하는 사항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은 학계의 도움이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성숙한 삶’이라는 기준에서 경제민주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제민주화는 지극히 단순화하여 말하면, 소유의 평준화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숙한 삶’과의 관계에서 보다 복잡하게 말하면, 그것은 구김 없는 인간성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고, 증오와 원한이 아니라 상호존중의 윤리에 기초하는 사회를 위한 물질 질서를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기준은 정치를 맡겠다는 사람들의 현장적 사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마땅하다. 


정책의 논의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논의의 근본이 되는 것은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어떤 기초이다. 그 기초가 단단해야, 정책 토의는 파당적 갈등을 넘어 우리 삶에 대한 토의가 될 수 있다. 정책은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깊이에 대한 사회적 탐구에 그 뿌리를 갖는다. 정치지도자에게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정책만이 아니라 정책의 뒤에 있는 바 이 뿌리에서 나오는 인간적 삶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이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그의 인격이다. 이 인격이 주축이 되어 정책은 일관성을 얻고 동시에 상황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는 것이 된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로, 사람의 생사, 화복, 수명 그리고 일의 연월일을 귀신처럼 예언하는 신들린 무당이 있었다. 제자가 안내하여 호자(壺子)라는 현자의 관상을 보게 하였다. 무당은 그의 상을 보고 한번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하고, 그 다음은 병이 나아 생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다음 번에 무당은 얼굴의 상이 변화가 심해서 관상을 볼 수 없다고 하면서 호자를 피해 달아나버렸다. 처음 호자는 무당에게 땅의 조짐을 보여주었고, 두 번째는 하늘과 땅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무당은 이 조짐에 따라 점을 친 것이다. 호자가 세 번째 보여준 것은 표면적인 증상을 넘어 가는 본질적 실체였다. 그러나 무당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 우화의 뜻은 근본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 증상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상적 증후가 아니면 무엇으로 세상 형편이나 추세를 판단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수시로 나타나고 없어지는 증후에 더하여 그 너머에 있는 사실의 근본에 또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노력을 버릴 수는 없다. 학문--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이 이러한 근본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학문의 근본이 그러한 근본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삶을 깊이 있게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체제를 다스리는 법술(法術)을 고안하고 스스로 쓸모에 봉사하는 것이 학문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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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