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0대 중반의 우울 탓인가. 눈물이 잦아졌다. 대통령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우리 아이 살려 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엄마의 사진을 보며, 엄마의 비원에도 끝내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보며 숨이 막힌다. 자주 절망을 느낀다.

엊그제, 벌떡 일어나 그간 미루어 온 청년 인문학 결사(結社) 꾸리기에 나섰다. 그냥 ‘모임’이라고 하지 않고 ‘결사’란 한자어를 쓴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결사가 주는 어감대로, 조금 더 독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다. 이 결사에 이어 주부 공부 모임도 만들기로 하고 강의며 길잡이를 감당할 학자들과 머리를 맞댔다.

요 며칠,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참사에 넋을 잃고 있다 허둥대며 이런저런 공부 모임을 자꾸 서두른다.

청년 인문학 결사는 앞으로 1년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것에 미쳐보자는 공부 모임이다. 여러 고전과 신간들을 합쳐 100~150권쯤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적어도 100편 정도의 글은 써보자는 것이다. 아울러 같은 기간, 프랑스어, 독일어, 한문, 중국어, 일본어 등 영어를 제외한 2개 언어는 익히자는 것이 이 모임의 또 다른 목표다. 이를 위해 강좌와 세미나 등을 소화하는 데만 매주 10~15시간은 필요하다. 책 읽고 글 쓰고 생각하며 외국어 익히는 시간까지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공부해야 한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도 바쁜 청년들이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아이를 잃고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부모를 보면서, 한가하게 공부나 하자는 것이 말이 되는가.

<철학의 위안>이란 책이 있다. 로마 후기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쓴 책이다. 유력한 귀족 출신 정치가이자, 그리스의 지적 전통을 중세 서양에 전한 철학자로 승승장구하던 보에티우스는 만년에 실각, 투옥돼 처형됐다. <철학의 위안>은 승승장구하던 그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쓴 책이다. 인간의 삶이 예고도 없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며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남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을 코앞에 둔 그는 뼈를 파고드는 물음에 답을 찾으며 힘겹게 책을 써 내려간다.

2. 우울증은 뒤늦게 시작한 프랑스어 공부를 하는 중에도 수시로 찾아든다. 술과 스트레스와 게으름으로 찌든 50대의 몸과 머리를 마루타 삼아 프랑스어에 달려든 지 한 달여, 벌써 보람보다는 회한이 크다. 내가 속한 프랑스어 공부반의 기본은 암송이다. 샹송이든, 시든, 명문장이든 매주 일정 분량을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이다. 이렇게 암송으로 프랑스어를 온몸에 집어넣으면서 그 언어가 몸속에서 정렬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샹송과 명문 몇 편, 가까스로 외웠다 후딱 잊어버리기를 거듭하면서 작지만 성과는 없지 않다. 프랑스어가 익숙해진 것이다. 눈뜬 까막눈이었던 프랑스어가 더듬더듬 읽히는 것은 더 놀랍다. 프랑스어 <어린 왕자>가 사전 몇 차례 들추는 것으로 한 페이지씩 어렵잖게 넘어간다. 그사이 생각지도 않았던 일도 생겼다. 프랑스어를 들으려 애쓰다 보니 엉뚱스럽게 영어가 잘 들리는 것이다. 영어 읽기 또한 눈에 띄게 편해진 것은 처음 대하는 프랑스어를 해독하느라 애쓴 탓인가. 청년 인문학 결사에서 6개월마다 외국어 하나씩 익히자고 제안한 것도 이 작은 보람에 힘입어서다.


하지만 더 큰 건 역시 좌절감이다. 암기력이 참담할 정도로 쇠퇴한 것이다. 외우는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수십 번을 읽고 들어도 짧은 샹송 하나가 제대로 외워지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외운 것을 잊어버리는 속도 또한 금붕어 못지않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느끼는 보람보다 회한이 더 큰 것은 내 몸과 머리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것을 확인한 탓이다. 미안하다, 몸아. 들이붓는 술에 찌든 채 버려진 뇌세포들아….

3. 절망과 우울은 내 몸 아닌, 세상을 보아도 한 가지다. 사람보다 돈이 최고가 된 세상이다. 부동산 투기만 돈이 되는 것이 아니고 차갑고 캄캄한 바닷물에서 공포에 질린 생때같은 아이들의 생명도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이다. 정치적인 득실부터 따지는 세상이다. 재작년 말,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한 청년이 전화했다.

“이제, 공부라도 제대로 해야겠어요.”

이 청년의 제안으로 모여든 청년들이 함께 밥 지어 먹고 청소하며, 책 읽고, 글 쓰고, 토론하기를 1년여. 마지막 두 사람이 남아 명맥만 유지하던 이 모임이 얼마 전 모두 흩어졌다. 청년들이 하나, 둘 직장을 잡더니 이들마저 일터로 떠난 것이다.

진도 앞바다 참사를 보며 넋을 놓았다가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공부 모임을 꾸린 것은 이 청년의 전화가 생각나서다.

인문학은 왜 하는가. 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다. 아픈 이들과 더불어 아파하기 위해서고, 이런 세상을 만든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해서다. 미셸 푸코는 말했다. 지식인의 역할은 예언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일들을 정확히 보는 것이라고. 자기 변형의 위험을 감수하고 본 것에 대해 발언하며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런 공부, 이런 인문학을 학문보다 돈을 더 생각하는 대학들이 버린 것은 당연하다. 공감 능력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정부가 인문학 운운하는 것도 기만이다.

이들에게 인문학은 쓸데없다. 그럼에도 공동체가 공부 모임을 자꾸 만드는 것은 이런 때일수록 더 공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