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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는 밥을 공양이라고 말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왜 그렇게 부르는지 꽤 궁금했다. 어떤 사람은 “자연과 뭇 중생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보살로서 살겠다는 의지와 깨달음을 얻겠다는 의식”이 공양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즉 ‘발우공양’을 줄인 말이 공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밥을 공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내가 확실히 납득한 것은 그게 공희(供犧)와 같은 말이라는 것, 그리고 공희란 산스크리트어 야즈나(yajna)의 번역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야즈나’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 전체를 통해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고대 이래 인도의 성자들은 생명·삶의 원리는 무엇인가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야즈나’라는 말로 설명해왔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명·삶은 누군가가 내게 바치는 희생 없이는, 그리고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바치는 희생 없이는 한순간도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간단히 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밥을 못 먹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고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데 밥은 쌀로 짓지만, 쌀은 땅과 하늘, 바람과 구름과 비의 ‘자기희생’, 농부와 그 가족의 헌신적인 땀, 그리고 그들의 이웃과 공동체의 노고와 협력이 없으면 단 한 톨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밥 한 그릇을 알면 만사(萬事)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말을 쓰는 우리는 때때로 밥이라는 말을 ‘희생물’이라는 뜻으로 노골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넌 내 밥이야” 혹은 “내가 당신의 밥이란 말이냐”라고 우리는 종종 말할 때가 있는데, 그때 밥이란 제물(희생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내가 당신의 밥이 되어줄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지만, 여하튼 한국어 어법 자체에 벌써 밥=희생물이라는 생명사상이 명확히 내포돼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는 대개 우리 자신이 남의 밥=제물이 되는 것은 별로 내켜하지 않지만, 무의식중에나마 ‘희생’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인가는 잘 알고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수많은 민담·전설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돼온 전형적인 미담일 것이다. 그리고 비근하게는 가령 야구시합에서도 늘 큰 박수를 받는 선수는 ‘희생번트’로 자기는 죽고 그 대신 앞선 주자를 살리는 선수이다.

그런데 인도의 고대사상에서 ‘야즈나’를 만물의 존재 원리로 파악한 것은 ‘희생’이 반드시 생명·삶의 손실을 뜻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희생하는 존재 자신에게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의 밥이 된다는 것은 돌고 돌아서 결국 누군가가 내 밥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 만물이 이런 생명·삶의 사슬로 엮어져 있음을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매우 시적인 언어로 갈파한 분이 바로 동학의 두 번째 지도자 해월 선생이었다. 동학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 만물은 전부 ‘한울님’이다. 그러므로 모든 ‘한울님’은 다른 ‘한울님’들을 먹여살리는 밥이자, 동시에 다른 ‘한울님’을 밥으로 삼아 살아간다. 그래서 이천식천인 것이다.

해월 선생의 이 간명한 은유는 뛰어나게 심오한 생명사상의 표현이다. 피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 속 생명붙이들의 관계는 서로서로를 잡아먹는 극히 살벌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월 선생은 그것을 오히려 생명체 상호간의 상호부양과 공여(供與)의 관계로 파악한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평소에 새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감옥에서 쓴 어떤 편지 속에는 철새들의 이동에 관한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북유럽에서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철새들은 아프리카의 나일강 쪽으로 대거 이동을 하는데, 그 먼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독수리 등 맹금류들에게도 심히 힘든 여정이다. 그래서 새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완전히 탈진하여 모래밭에 며칠이나 쓰러져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맹금류들에게도 험한 고행길인데 노래하는 작은 새들은 어떻게 그 먼 길을 가는가? 과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철새가 이동하는 계절에는 하늘에서 잠시 ‘휴전’이 성립한다. 즉 작은 새들은 큰 맹금류의 등에 업힌 채 머나먼 길을 간다는 것이다. 오래전, 로자의 서간집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하기는 이 모든 것은 불가(佛家)에서는 원래 극히 낯익은 상식이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天地同根萬物一體)”이라든지 “세상은 순환하며 뭇 중생을 살린다(空界循環濟有情)” 등의 표현은 모두 그러한 근원적인 생명사상·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 사상적 뿌리에서 밥을 공양이라고 부르는 언어습관이 생겨났을 테지만, 어쨌든 공양이라는 말로써 한국불교는 우리가 매일 습관적으로 먹는 밥이지만 그때마다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의 산물인지를 우리가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전통을 세우고 계승해온 것만으로도 나는 한국불교의 공로가 크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일개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삶의 근본이치를 가르치고, 그 근본이치에 따라 사람이 겸허한 마음으로 단순·소박하게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는 실천적 지식·사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절집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나는 산중 사찰들에 즐비한 자동차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척 편치 않다. 게다가 한국불교의 기둥이랄 수 있는 조계종에서는 선거 때마다 금품이 난무한다는 소문이고, 동국대에서는 비리 혐의를 받는 총장(스님)이 외려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과 교수를 탄압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졌다. 며칠 전에는 미국인 출가자 현각 스님이 한국과 인연을 끊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돈을 너무 밝히고 권력자에게 굴종적인” 한국 사람들에게 질린 모양이다. 범부들이라 할지라도 재물에 집착하는 것은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하물며 출가 수행자들이 돈과 권력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백합이 썩을 때 그 냄새는 잡초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셰익스피어)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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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