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출판계와 일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작은 가십이 돌았다. 모 일간지 남자 기자가 자기 애인(여성)을 필진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내 별명이 라스트 원(맨 마지막에 소문을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웬만한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는 얘기다. 반응은 성별에 따라 달랐다. 여성은 익숙한 이야기인 듯 “(가부장제 사회의) 인생사지, 뭐, 새삼스러워?”라며 자조했고, 남성은 “여자들 실력이야 어차피 비슷한데, 뭐가 문제야? 남녀상열지사지”라고 당연시했다(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여자들 실력은 비슷하다”는 심각한 성차별 발상이다).

알다시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는 조선 건국 초기 성리학 세력이 고려시대 노래를 비하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이 단어는 이미 정치적 산물이었다. 고려 가요 가사에는 남녀 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많아 조선의 국시(國是)에 거스른다 하여 비난하는 뜻으로 쓰였지만, 오늘날에는 이성애(異性愛)를 통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좋아하는 것,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는 제도이고 규범이고 권력관계지, 자연스럽거나 자명하지 않다. 사랑은 모든 정치의 시작이자, 정치 중의 정치다. 하지만 이 말처럼 탈정치적이고 비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물다.

만일 위 사건이 연인이 아니라 합법적 부부이거나 서영교 의원의 경우처럼 부모 자식 관계였다면, 혹은 지금 검사들의 집단 비리처럼 남성 간의 관계였다면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비가시화된 혼외 관계일 경우, 권력관계가 아니라 스캔들 혹은 가족 제도 밖의 ‘순수한 사랑’으로 보호받는 것이다.

이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유행하는 ‘여자사람친구’ 혹은 ‘남자사람친구’라는 말이 생겼다.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생각게 하는 심오한 조어다. 문법적으로 ‘여자사람친구’는 틀린 말이다. 가장 넓은 범위는 ‘사람’이므로 ‘여자’와 ‘친구’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여성과 인권’이 틀린 표현인 이치와 비슷하다. 이 조합에는 이미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남자 친구) 있니?”라고 물었을 때, 여친은 애인을 뜻한다. 중간에 ‘사람’이 들어가는 경우는 여친이나 남친이 문화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기혼 남녀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다시 말해, ‘여사친’과 ‘남사친’이 탄생한 배경은 다음과 같은 원리가 작용한다. 이성애 제도에서 남성과 여성은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친구가 되려면 성별을 따지지 말아야 되고, 일부일처를 규범으로 하는 결혼 제도에서 이성 친구는 곧 불륜으로 의심받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람’이, 단어 중간에 들어가야 안전해진다.

부모 자식 관계를 포함, 모든 인간관계는 교환이다. 사랑은 더욱 그렇다. 교환은 상업적인 의미에서 상호 작용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운동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사랑의 교환 법칙과 성산업에서 매매의 법칙이 연속선에 있다는 현실을 설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자는 낭만화와 정상성을, 후자는 낙인과 혐오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는 여성이 성을 기준으로 창녀와 성녀로 이분화되는 과정이다. 남성의 존재는 성을 기준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성역할-이성애-결혼-성매매의 연속선 개념은 “신성한 결혼과 매춘을 동일시하다니”라는 분란을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이 연속선이 차별인 이유는 교환 법칙의 공통점 때문이다. 어느 관계에서나 남성의 자원은 돈, 지식, 지위 등 사회적인 것에 반해 여성의 자원은 여전히 외모와 성, 성역할 행동(애교, ‘여우짓’, 연애화된 인간관계…)이다. 매력과 자원의 성별화. 남녀의 자원에 대한 사회적 평가, ‘유통기한’, 교환 원리는 정반대다. 이것이 차별이다. 남성은 이성, 여성은 몸으로 간주되는 가부장제 문화질서다. 자신보다 ‘나이 많고 뚱뚱한’ 여성을 사귀는 남성은 드물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근원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다. 불평등 교환이기 때문이다. 이 불평등 교환을 잘 이용하는 소수의 여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그럴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원 있는 남성 역시 소수이기 때문이다. 위 사건은 규모가 다를 뿐, 우병우씨 사건과 같은 권력형 비리다.

예전 기혼 남녀의 사랑은 성매매와 사랑이 주요 양상이었다면, 요즘은 사랑과 비즈니스가 결합한 경우가 많다. 문제가 될 경우 “진정한 사랑” 주장파와 “비즈니스/술친구” 주장파로 갈리지만, 사랑과 비즈니스가 분리된 사랑이나 인간관계는 없다. 중년 기혼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고 치자. 남성은 자원이 있고 여성은 없거나, 없는데 욕망만 크다. 남성은 여성의 스폰서가 된다.

이것은 “어떤 인간관계에서나 발생하는 일”인데, 사람들은 나더러 왜 정치적 이슈냐고 묻는다. 거듭 말하지만, 요점은 다른 인간관계와 달리 남녀 관계에서만 작동하는 교환의 전형성과 차별성이다.

한국은 연줄이든 네트워크든, 관계사회이다. 그 관계는 주로 남성연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여성은 여성성 혹은 섹스로 그 연줄에 동승하기 시작했고 점차 당당해지고 있다. 신○○씨 사건이 ‘일반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여성이나 진보 진영에서도 드물지 않다. 여성은 계급, 나이 등 서로 다른 상황에 있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해(利害)를 실현한다. 여성주의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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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