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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은 시나브로 어두워가지만 낮 동안 달궈진 ‘봄의 마을’ 광장의 시멘트는 여전히 후끈거립니다. 장마는 끝나고 더위는 말복을 향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맹위를 떨칩니다. 바람 쐬러 나온 사람도 몇 보이지만 바람은 불지 않습니다. 


8시. 몇 안 되는 음식점도 파장을 준비하고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밤새 불 밝힐 24시간 편의점들이 슬슬 존재를 드러냅니다. 한여름 저녁 8시는 해 지는 시간이자 곧 잠들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인구 몇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소읍에서 촛불집회란 애당초 어울릴 일이 별로 없는 것이라 ‘국정원 규탄 민주주의 수호 서천군 촛불 문화제’는 불야성 서울 한복판의 그것과는 시공간, 즉 차원이 다른 무엇입니다.


서너 차례의 목요일 집회에 모인 사람은 30여명에서 100여명 수준. 매번 모일 때마다 ‘왜 우리는 더 많이 모이지 못할까’가 주제이고 ‘더 많이 모이는 방법’이 곧 전략과 전술이 되겠으나, 서울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영상이 머리 깊은 곳까지 박혀 있어서, 어떻게 하더라도 성에 차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기죽지 않는 것, 안 온 사람 찾지 않는 것, 모인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노는 것, 참가자에게 선착순으로 음식과 조용필 공연 티켓을 제공하여 안 오거나 늦게 온 사람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며 선진 집회 문화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경향DB)


앞에서 마이크 잡고 하는 이야기야 매번 거기서 거기. 여전히 풍전등화인 조국의 위기도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TV나 라디오나 팟캐스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는 정세분석을 이야기하는 사람만이 대개 연사로 나오는 것도 읍내처럼 뻔하고 답답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뻔하고 답답한 사람들끼리 마주 앉아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읍내 건물들 사이로 뜨는 초승달과 몇 개의 별이 훨씬 더 잘 보이게 마련인데 이때 비로소 촛불과 나 사이에 전류가 흐르며 본격적인 촛불집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분노로 시작했고 ‘이래도 되나?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는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돈도 안 되는 자리에 일단은 이렇게 모였습니다. ‘정말 촛불로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아니, 단 한 명에게라도 책임을 물을 수 있어? 촛불로?’ 하는 비웃음과 냉소에 맞서는 것이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럴 때 보라고 달도 뜨고 별도 뜨고 옆자리에는 나보다 더 한심해 보이는 인간들도 앉아 있는 것입니다. 도망가지 않고 꾸역꾸역 대답거리를 찾다가도 결국엔 ‘나를 걸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곳으로 몰리게 되는데, 나를 거는 것은 곧 결단의 문제입니다. 


가장 먼저는 옆에 있었으면 좋을 사람이 생각나고 곧이어 평소의 다짐들이 떠오릅니다. 내가 변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세상의 변화라는 것이 공염불이라는 깨달음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이리 되면 ‘국정원 규탄’과 ‘민주주의 수호’는 결국 나의 수양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인데, 성급한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심지어 ‘금연’을 결심하는 악수를 두기도 하는 것입니다. 


작고 외지고 초라해서 ‘우리의 구호가 진실로 저들을 아프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위로 뜨겁게 달궈진 촛농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집니다. ‘뭘 하기는 한 거니?’


궁색하게나마 문화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 준 트럼펫 청년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삑삑’ 하며 연주할 때보다 “잘 못 불러서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더 연습해서 오겠습니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더 행복해했고 더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젊은 부부를 따라온 아이들은 엄마 아빠 옆에 촛불을 들고 잠깐 앉아 있기도 했지만 이내 더 넓은 광장에서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행진이라도 해 보자는 과격파와 ‘그냥 해’ 하는 온건파의 갈등은 해묵은 것.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냥 그런 채로 평생 살아갈 것입니다. 100여명의 사람들을 서울 인구 비례로 따지면 5만명은 되겠다는 설레발도 잠시 재미있기는 하지만 100명은 100명일 뿐이고 누구에게는 100표일 뿐.


광장을 수놓은 촛불... (경향DB)


그러니 매번 욕먹을 사람 이름자나 바꾸는 혁명 따위는 서울광장에 모인 거대하고도 듬직한 물결에 맡기고, 물결이 아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여기, 8시면 불 꺼지는 변방의 몫, 세상이 우리에게 분담한 역할이 되겠습니다. 가령,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슈퍼맨인지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인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국가인지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인지 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답이야말로 촛불이 다한 후 알곡으로 남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가 국정원 규탄과 민주주의 수호인 줄만 알겠지만 촛불을 통한 인격수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관계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목표라고 농담 비슷하게 말할 때, 국가정보원에서는 알아듣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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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