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그간 말로만 들었던 영남알프스를 걸었다. 배내봉-간월산-간월재-신불산-신불재-영축산-배내골까지. 우리의 고유한 지형에 공연히 딴 나라의 유명세를 끌어대는 게 조금 못마땅했지만 까짓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어깨를 겨눈 산들의 웅장함이 너무 좋았다. 남으로 내달리다가 멀리 동쪽으로 애달픈 국토의 막내인 양 호젓하게 울릉도를 점찍어놓고 그 아쉬운 마음을 일으켜 바다로 뛰어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최대치를 일구었는가.

낙엽진 알몸의 산들은 사람을 위협하지도 압도하지도 아니 했다. 재를 넘을 때마다 길손처럼 서 있는 안내판은 이 지역의 풍상을 실감나게 전해주었다. 소리내어 읽으면 입에 착착 들러붙는 문장들이다. ‘오뉴월 엿가락처럼 휘어진 긴등(長登)’ ‘기러기처럼 떠도는 장꾼들이 모이던 배내고개’ ‘산짐승 울어대는 첫새벽, 호롱불을 든 배내골 아낙들이 선짐이 질등을 올랐다’ ‘밥물처럼 일렁이는 5만평의 억새밭은 백악기시대 공룡들의 놀이터이자 호랑이, 표범과 같은 맹수들의 천국이었다. 간월산 표범은 촛대바위에 숨어 지나가는 길손을 노렸고…’.

남부지방산림청장의 고시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설앵초, 방울난초, 처녀치마, 개회나무, 산오이풀, 참조팝나무 등이 분포한다고 했다. 내년에 이 산으로 개근을 해도 공룡, 호랑이, 표범이야 만날 수 없겠지만 때를 잘 맞춘다면 저 나무와 풀들은 만날 수 있겠다. 오늘 나의 아쉬운 눈길과 피곤한 발길에 위안을 던져주는 나무가 있었으니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노각나무였다.

눈으로 보아도 단단하기 이를 데 없고 손으로 만지면 묵직한 느낌이 팅팅팅 울려나는 나무이다. 수피가 사슴뿔인 녹각(鹿角)을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도 하는 나무. 여름에 만나면 우아한 흰 꽃과 함께 레고처럼 껍질이 일어나더니 겨울에 이르자 크리스마스트리에 붙이는 장식구처럼 여러 문양이 도드라진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900여종의 나무 중에서 내 특히 좋아하는 노각나무. 조상을 모시는 제기(祭器)로 안성맞춤이라기에 더더욱 각별하게 쓰다듬는 나무, 노각나무. 차나무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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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