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어의 세계는 저수지를 닮지 않았다. 고여 있지 않다는 뜻이다. 새로 만들어져 등장하는 단어도 있고,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퇴장한 단어도 있다. 가치관이 변했기에 쓸모없어진 단어도 있고, 새로운 가치관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진 단어도 있다.

시대가 바뀌거나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관이 달라지면 새로운 단어가 필요해진다. 새로 만들어진 단어 즉 ‘신조어’는 늘 양면적이다. 언어의 규칙을 파괴하는 ‘신조어’도 있지만 가치관과 세태의 변화를 반영하는 ‘신조어’도 있다. 신조어는 때로 미래에 만개할 혹은 만개하기를 바라는 징후를 담고 있기도 하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1920년에 <신여자>라는 ‘신조어’를 표제로 내세운 잡지가 창간됐다. ‘신여자’라는 ‘신조어’는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저 가정의 주인 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이라는 징후를 반영한다. 급기야 <부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던 개벽사도 1923년에 ‘신여성’이라는 신조어를 선택했고 <부인>을 폐간하고 <신여성>이라는 제호의 잡지로 재창간했다. ‘신여자’이든 ‘신여성’이든 배경 징후는 동일하다. 여자는 달라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신조어’는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100여년에 걸쳐 여자는 실제로 달라졌다. 미래 징후는 사실이 되었다.

2009년 대학에 진학하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2014년 기준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의 74.6%가 대학에 진학하지만 남자는 그에 훨씬 못미치는 67.6%만 대학에 진학한다. 한때 특별한 여자를 의미했던 ‘배운 여자’는 더 이상 특별한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 예전과는 달리 당대의 보통 여자도 ‘배운 여자’이다. 현기증이 날 속도로 여자는 변했다. 여자는 변화에 민감하다. ‘배운 여자’가 사회에 진출해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서는 변해야만 한다. 변하지 않은 여자는 유리천장을 뚫을 수 없다. 절실한 사람이 더 빨리 변한다. 그래서 100여년 사이에 여자는 정말 빨리 변했다.

현존 질서에서 이득을 보고 있거나 적어도 손해를 보고 있지 않은 사람은 변화에 둔감하다.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때로 적극적으로 변화에 반대하기도 한다. 여자에 비해 남자는 변화에 둔감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도 100여년 동안 변했지만, 남자가 변화하는 속도는 변화가 더 절실한 여자가 변화하는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 남자는 앨리스가 거울나라에서 처한 상황과 유사한 처지이다. 거울나라에서는 모든 게 뒤로 간다. 그렇기에 거울나라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사실상 뒤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울나라에서는 앞으로 가려면 뒤로 가는 속도의 힘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니 전진하려면 거울나라에서는 뛰어야 한다. 가만히 있거나 천천히 걷는 속도로 변화하는 사람은 거울나라에서는 의도치 않아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 보수주의자가 되는 셈이다.

한국이라는 거울나라에서 대부분의 남자가 천천히 걷고 있거나 아예 걷고 있지 않지만, 어떤 남자들은 변하기 위해서 뛰고 있다. 그들을 일단 ‘신남성(the new man)’이라 부르자. 

두 명의 ‘신남성’에게 그들이 거울나라에서 걷지 않고 뛰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한 명의 ‘신남성’은 20대 미혼이며 또 다른 ‘신남성’은 30대의 기혼이다. 30대의 기혼 ‘신남성’은 ‘남자답다’는 정체불명의 규정에 자신을 맞추는 게 싫었다고 했다. 감정을 억제해야 남자답다는 소리를 듣는 성규범도 불편했다고 했다. 자신을 가부장에서 탈출한 남자에 가깝다고 묘사를 했으며, 탈출과 더불어 ‘남자답다’는 성규범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삶의 무게가 줄어들어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20대의 미혼 남성은 “여자를 도구로 대하는” 남자들의 세계가 불편했고, 굳이 그 세계에서 ‘남자답다’는 평가를 받아 마초의 훈장을 가슴에 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남자들의 설명질, 즉 맨스플레인을 싫어하는 이들은 당연히 다리를 쩍 벌리고 앉지도 않는다.

‘신남성’이 이들을 지칭할 수 있는 적절한 신조어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 또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고 있지 못했다. 이들과 여러 가지 후보 단어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지만 끝내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들을 명명할 수 있는 단어는 아쉽게도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전형적인 남자의 틀에서 상당히 벗어난 남자라는 점만은 선명하니 마냥 낭패는 아니다.

신여성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신여성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여성은 당연히 극소수였다. 신남성이 수적으로 얼마나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남성이라는 신조어는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징후를 지칭한다. 한국이라는 거울의 나라에서도 가만히 있거나 걷지 않고 뛰는 남자들도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는 일단 희망적이다. 그래서 반갑게 이들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남성씨”라고. 그리고 첫인사말에 덧붙였다.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같이 뛰면서 알아봅시다”라고.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