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 주요 후보 진영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문제는 후보 간 공방이 국가를 이끌어갈 비전이나 정책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명색이 대선 후보라는 사람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막말과 자신들이 불과 몇 달 전에 선출한 후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치철새들의 행태는, 대통령과 측근들이 저지른 국정농단의 뿌리가 결국 퇴행적이고 야만적인 정치문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상대 후보에 대한 음해와 흑색선전, 정치적 야합이 대선 판을 달굴수록 국가 비전과 국정 운영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 환경 분야만 보더라도 그렇다. 미세먼지, 원전, 4대강 등 핵심 쟁점들은 다수 후보들의 공약에 포함됐지만 이들을 하나로 꿰어낼 국가 비전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장식품으로 전락했던 ‘지속가능한 발전’의 재구성 문제를 충분히 토론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논의는 지난 3월 말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한 국회의원이 “차기 정부의 국정기조를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게 전부다. 우리 정치권의 무관심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환경문제만이 아니라 양극화, 고령화, 일자리, 복지 등 경제와 사회 분야 문제들을 동시에 풀어나갈 수 있는 길잡이로 여기는 국제사회의 태도와 대비된다.

우리나라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렇게까지 홀대받게 된 데는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녹색성장’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상위 개념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녹색성장을 앉히는 ‘이념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알려진 것처럼 녹색성장의 저작권이 이명박 정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녹색성장이라는 용어는 2000년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사용했는데, 국제사회에서 녹색성장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참여정부였다. 2005년 3월 서울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 환경과 개발에 관한 각료회의의 주제가 녹색성장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준다.

녹색성장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보완재가 아니라 대체재를 자임하는 순간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녹색성장은 경제와 환경이 민주주의, 빈곤, 양극화, 평화, 복지 등 사회 문제들과 갖는 상호작용을 다루지 않는다. 녹색성장이 4대강사업, 원전 확대, 그린벨트 해제 등 ‘갈색성장’의 길을 가게 된 것도 낡은 성장장식의 유혹과 산업주의 담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환경보호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이념의 뿌리는 1980년대 초 유럽에서 제기된 생태적 근대화론에서 발견된다. 생태적 근대화는 환경 친화적인 기술혁신의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다. 기술혁신을 통해 자원과 에너지의 투입을 줄이고 ‘생태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면, 환경보호는 경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녹색성장이든 생태적 근대화론이든 생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의 성장을 추구하는 순간, ‘기술 중심주의’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한 사회가 혁신의 주도성을 기술에 넘겨주게 되면, 환경과 경제의 선순환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파급되지 못하고 산업이 주도하는 시장의 좁은 울타리에 갇히게 된다. 이는 녹색성장이 ‘사이비 담론’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새 정부는 지속가능한 발전 2.0의 시대를 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녹색성장에 어른거리는 이명박 정부의 그림자 때문에 녹색 문패까지 통째로 버려서는 안된다. 경제를 사회와 환경에 굴복시키지 않으면서도 경제는 사회에 포섭되고 사회의 작동원리는 생태계의 법칙에 따르는 새로운 국가비전이 있다면, 그것에 어떤 명칭을 붙이던 우리는 좀 더 생태적 진실과 사회정의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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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