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후 나의 두 눈을 향해 길이 자라났어요.

나는 그 길을 더 이상 알지 못해요.

이제는 모든 것이 나의 내면에서 아무 걱정 없이,

확실한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병이 나아가는 사람처럼

감정들은 걷기를 즐기면서

나의 몸의 어두운 집을 이리저리 걷고 있어요.

(…)

나의 이마는 보고, 나의 손은 남의 손에 들린

시들을 읽었지요.

나의 발은 발길에 와닿는 돌들과 이야기하고,

새들은 일상의 벽에서

나의 목소리를 가져가지요.

나는 이제 그렇게 아쉬운 게 없어요.

모든 색깔들은

소리와 냄새로 옮겨지니까요.

색깔들은 음향으로 한없이 아름답게

울립니다.

책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요?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요.

나는 거기에 무슨 말이 적혀있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가끔씩 그것을 살며시 되풀이해보지요.

그리고 마치 꽃송이처럼 두 눈을 꺾어가는 죽음도

나의 두 눈을 찾지는 못할 겁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김재혁 옮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불 좀 켜주세요! 불 좀! 나는 꿈속에서 외치곤 했어요/ 공간이 무너졌어요. 내 얼굴과 가슴에서/ 이 공간 좀 치워주세요.” “내가 없는데! 내가 없는데 도대체 낮이 있을 수 있나요?” 눈먼 후에 여인은 이렇게 절규했다. 그때 눈은 온 세상을 가두는 감옥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지나간 후, 눈 바깥으로 나 있던 길은 눈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뻗어간다. 촉감과 소리와 냄새가 시각으로 바뀌는 새로운 세상이 몸 안에서 펼쳐진다. 나무와 자연과 바람이 만든 책을 읽는 밝은 귀가 열린다. 보이는 것을 볼 수 없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예술은 어떻게 생겨나고 시는 왜 우리에게 오는가. 이 시에서 그 은유가 보일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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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