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하나의 테스트(?)가 있다. 일단 종이 한 장을 준비해 펜을 든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서 소중하게 만난 인연, 귀하게 여기는 사람 열 명의 이름을 써본다. 열 명을 다 썼다면 자신이 쓴 이름들을 살펴보고 다음 질문에 몇 개나 대답할 수 있는지 체크해보자. 


당신이 이름을 쓴 사람들 중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당신과 다른 수준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있는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은? 성(性)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은? 국적이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은? 인권활동가 류은숙의 책 <사람인 까닭에>에 나오는 테스트인데, 내가 동그라미 칠 수 있는 이름은 아무리 후하게 평가해도 1개를 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거나 꾸준히 만나는 사람 중에 소수자는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올해 새로운 일을 맡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했다. 통계상으로는 분명 내가 사는 도시에도 꽤 많은 수의 이주자들이 살고 있다는데, 정작 나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결혼이주여성이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너희는 택시비도 나라에서 내주니까 막 타고 다니는 거 아니냐. 나라에서 지원 많이 해줘서 좋겠다”며 내내 혼을 내더란다. 처음에는 그런 심한 말을 들으면 집에 와서 엉엉 울었지만, 그 여성은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기까지 했다.


택시기사의 생각과 달리 한국인 엄마와 외국인 아빠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다문화가족 지원정책의 수혜자가 되기 힘들다. “그러게, 왜 못사는 나라 남자랑 결혼하느냐”는 노골적인 비난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다문화가정 사랑의 김장 (출처 :경향DB)


심지어 다문화 배경 청소년을 가르치는 학교의 한 선생님은 “우리가 이 아이들을 잘 교육해야 부모님이 걱정 없이 현장에서 일할 수 있고, 그래야 물건의 불량률이 떨어져서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해 나를 놀라게 했다. 


2006년 남북 대표단 회의가 열렸을 때, 북한은 남한의 인종적 혼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한강에는 단 한 방울의 잉크도 떨어져서는 안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단다. 우리는 아직도 이주민들을 단일민족이라는 한강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잉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문화 배경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요구사항은 “우리를 특별히 취급할 필요 없다. 일일이 해주지 않아도 된다”였다. 다문화 배경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아동센터의 선생님들의 조언도 비슷했다. 다문화 배경 아이들만을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같이 생활하고 노는 와중에 서로의 차이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아이에게 스마트폰 게임을 가르쳐주고 싶으면, 구글 번역기를 돌려 이야기를 나눈단다. 관건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관계이지, 방법의 문제는 아니다.


한 인기 미국 드라마에는 입양한 베트남 출신 딸을 좋은 유치원에 보내고 싶은 백인 게이 부부가 나온다. 처음에 떨어질까봐 긴장하던 이 부부는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소수인종의 아이를 입양한 게이 부모’라는 자신들의 처지가 다양성을 중시하는 유치원 입학 정책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기양양해진 이들은 당연히 붙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장 원하는 유치원에 면접을 보러 가지만, 장애를 가진 다인종 레즈비언 커플이 입양한 흑인 아이를 만나 무릎을 꿇는다. 다양성의 차원에서 비교가 안되는 적수를 만난 셈인데, 코미디물인 이 드라마에서는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 정도로 끝났지만, 인상적이었다. 


지역균형·기회균등 선발로 뽑힌 학생을 ‘지균충’(지역균형선발의 약자 ‘지균’에 ‘벌레 충’ 자를 합쳐 폄하하는 단어)이나 ‘기균충’으로 비하하는 왕따 현상이 심각하다는 서울대의 현실과 비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정희성 시인의 시처럼,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다. 앞의 테스트에서 적은 열 개의 이름 옆에 자신있게 동그라미 표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난다면, 어쩜 우리는 정원의 나무가 아니라 숲속의 나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당신과 나를 존재 그대로 인정할 때 숲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


정지은 | 인천문화재단 직원·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2030콘서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비자는 어떻게 ‘봉’이 되었나  (0) 2013.12.03
군대 이야기  (0) 2013.11.26
다른 게 뭐 어때서  (0) 2013.11.19
“우리 모두가 최종범이다”  (0) 2013.11.12
‘박근혜 탄핵’은 없지만  (2) 2013.11.05
1989년, 그리고 2013년  (0) 2013.11.0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