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연애감정에 대한 호소 혹은 미개한 조선 사회에 대한 개탄을 담은 이광수의 <무정>은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요즘 인문학의 트렌드 중 하나는 ‘감정’이다. 이는 근대 계몽이성에 대한 반발이겠으나 희한하게도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서 정동과는 거리가 먼 ‘무심함’을 느끼곤 한다. 감성인문학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무정에 대한 호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분노하라> <미움받을 용기> 같은 감정교육 서적들이 인기를 끄는 것이 어쩌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방증 아닐까.

물론 수많은 SNS 채널을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하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떤 실감이나 육체성을 상실한, 말끔한 플라스틱 자아들의 향연과 같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의 자아들은 그림자를 상실한 동화 속 인물처럼 무언가를 제거하고 만들어진 조형의 얼굴들과 흡사하달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쌍방향이지만 어쩐지 어떤 겯고틀고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방향의 외침같이 들린다. 요컨대 말끔한 아바타들의 만남과 접속에는, 김수영식으로 말하자면 ‘하, 그림자가 없다’. 혐오문화 또한 배제의 기율 속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말끔한 제거술이 아닌가. 수많은 페친과 팔로어들을 지녔다고 자부하지만 각자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희한한 1인 자급자족 시대.

‘소확행’과 ‘워라밸’의 유행에 진입한 젊은 세대들의 감각은 확실히 타인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감정 교류에 있어서 어떤 불편함을 지닌 듯하다. 최근 읽은 소설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손원평의 <서른의 반격>은 ‘보통사람’ 시대에 태어난 1988년생의 이야기이다. 문화아카데미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주인공은 급여에 맞게 최저임금만큼의 최소 노동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인공 직장에서 벌어지는 부당함에도 눈감고 동료와의 점심시간을 피하기 위해 가짜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최소한의 노동은 최소한의 관계와 감정으로 이어지고 그들을 ‘최소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여기에 ‘규옥’이라는 한 문제적 청년이 등장한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주인공과 주변인물에게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자고 설파하고, 이들을 ‘가면, 계란, 공개 항의’와 같은 퍼포먼스로 이끈다. 어찌 보면 이들의 ‘항거’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한 놀이 같지만 작가는 급진적 혁명에 불과한 이러한 반격 말고 무엇이 가능하냐고 묻는 듯하다.

신인작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 등장하는 판교 테크노밸리의 한 청년도 이와 유사하다. 기업 회장의 인스타그램 속 자아를 배려하지 못한 대가로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 젊은 여직원은 회사를 박차고 나가거나 항의하는 대신 그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중고마켓에 되팔아 돈을 만든다.         

<서른의 반격>이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청년들은 반짝이는 거울 빌딩에 다니고 있지만 네모난 하늘을 품고 있는 판교의 한 게임회사 사옥처럼, 다만 자신의 내부에 광활한 하늘을 가두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압도적인 네모에 갇혀서 각자 조용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용이며 새떼, 열기구, 헬리콥터를 상상한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예를 들면 거북이라든지, 거북이 사진이라든지, 거북이 동영상이라든지”라고 고백하는 판교 여직원은 어쩌면 우리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헬조선과 탈조선을 외치던 그들은 그 불가능을 깨닫고 순회하여 이제 소확행에 안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거대한 꿈과 진정성, 치열함의 강조는 어쩌면 ‘꼰대’의 잔소리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의 무정과 무심함의 기원은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 치열하게 살았아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서른의 반격>)라는 항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자유와 정동을 감금한 이 시대의 소확행은 비정한 현실의 랜드마크가 아닐까.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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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