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이래 철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 즉 인간이 특별한 압력이나 통제 없이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되도록 인간답게 행동하려는 것에 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근래 과학은 그런 본성이 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이를테면 뇌의 ‘피각’ 부위는 효율성에 반응하며 ‘뇌섬’은 공정성에 반응한다. ‘미상/중격슬하’는 그 둘을 중재하고 균형을 맞추는 부위다. 인간의 뇌는 그 자체로 정교한 도덕 계산기라는 것이다. 연쇄살인범의 뇌는 안와피질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정상 범주의 뇌를 가진 사람도 외상에 의해 관련 부위가 손상되면 도덕적 기능이 변화한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인간의 도덕적 기능이 전적으로 뇌에 의해 결정된다면, 모든 인간의 뇌를 검사하여 도덕적 등급을 매기고 관리하는 완결적 형태의 파시즘이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뇌는 도덕적 기능과 작동에 전적이지 않다. 우리 가운데는 연쇄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졌지만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고 안정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덕에 큰 문제없이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 가운데 정상 범주의 뇌를 가졌지만 성장 환경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뇌 본연의 도덕적 기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뇌를 수정할 순 없고 사회가 개인의 환경에 낱낱이 개입할 방법도 없다. 도덕적 기능과 관련하여 우리가 함께 말할 수 있는 건 사회적 영향의 측면이다. 우리는 도덕적 본성을 고양하는 경향을 가진 사회에서 살 수도 있고 위축시키는 경향을 가진 사회에서 일생을 보낼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사회가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김수영은 그 문제에 대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한 사람이다.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그는 사회의 큰 구조에 분노하지 못하고 기름덩어리만 나온 갈비를 제공한 식당 주인이나 돈을 받으러 거듭 찾아오는 야경꾼(방범대원) 같은 작은 대상에만 분노하는 ‘나’를 조소한다. 김수영은 실은 그 구조에 분노할 때 심각한 불이익에 처하게 함으로써 도덕적 본성을 위축시키는 억압적 사회를 조소하는 것이다.

동시에 김수영은 도덕의 원근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멀리 있는 도덕은 작고 가까이 있는 도덕은 크다. 아무리 큰 일도 내 삶과 멀고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으면 작은 일일 뿐이다. 아무리 작은 일도 내 삶과 가깝고, 직접적 이해관계를 가지면 큰일이 된다. 원근법이 신이 아닌 인간이 주인인 세계를 그리려 한 르네상스 화가들의 고안품이었듯, 도덕의 원근법은 인간 도덕의 이상과 관념이 아닌 세속적 속성을 담고 있다.

김수영의 시대보다 나은 수준의 민주주의 절차가 작동하는 오늘 도덕의 원근법은 얼마간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큰 도덕은 멀고 작은 도덕은 가깝다. 김수영의 시대는 사회 구조에 분노할 때 심각한 불이익을 치러야 했지만, 이젠 상당 수준 허용된다. 대신 작은 것에 분노하는 게 구체적 불이익이 된다. 제 학교의 부당해고 강사나 비정규 노동 문제를 외면하는 좌파 교수. 전태일 이후 민주적 노동운동의 성과를 경제투쟁에만 쏟아붓는 조직노동. 수구 기득권 세력을 욕하며 제 기득권을 알뜰하게 챙기는 하고많은 진보시민들. 그들은 작은 것에 분노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큰 것에 분노한다. 그들의 도덕적 기능은 사회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제 기득권의 알리바이로 사회에 진열된다. ‘제 이해관계와 무관한 사회 문제에만 열을 내는 진상들’은 많은 인민들에게 진보의 일반적 이미지가 된 지 오래다.

그런 파탄적 상황은 사회 성원 전체의 도덕적 본성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다들 밥을 굶어 헬조선이 아니다. 더 가난하고 더 전망 없는, 지옥의 조건을 더 많이 가진 사회들이 적잖이 있다. 한국은 그런 조건을 불식하고 사회 성원들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나 빠르게 지옥에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사례다. 인간으로서 성찰과 인간적 행동의 욕구가 거세되어 가는 사회에서 혐오와 모욕은 사회적 소통의 골간이 된다.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마르고 거칠어진다. 사람의 가치를 외적 조건으로 평가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모습은 하위계급에서도 격렬하게 나타난다. 아이들은 경쟁 효율성을 위해 애초부터 도덕적 본성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키워진다. 지금 청년들은 그렇게 자란 첫 세대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김수영은 ‘지식인은 세계의 문제를 내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성’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지성의 힘으로 도덕의 원근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강퍅한 사람도 제 식구나 제 아이가 당하는 부당한 고통을 외면하는 경우는 없다. 제아무리 신념에 찬 리버테리언도 제 사적 관계 속에서 벌어진 착취, 불공정에까지 ‘경쟁 본능’이나 ‘시장 원리’를 설파하진 않는다. 누구나 분노하고 누구나 변혁하려 한다. 지근거리의 세계에선 누구나 휴머니스트이며 사회주의자다. 지성은 그런 도덕적 본성을 기억하고, 더 먼 거리의 상황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내는 현실에까지 일치시켜 보려는 인간 특유의 태도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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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