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을 위해 온 인생을 바쳤던 노회찬 의원을 죽음으로 내몬 조선일보식 질문이다. 참으로 비수 같은 프레임이었다. 진보라면서 어떻게 부인이 전용 운전기사를 부릴 수 있냐는 시비야 사실 너무 억지스러워 실소하며 넘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현행법상으로는 불법이 명백한 정치자금 수수 문제 앞에서 그런 식의 프레임은 고인같이 고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겐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었을 테다. 진짜로 잘못이 커서가 아니라, 평생을 정의와 진보를 위해 싸워 온 정치인으로서 삶 전체가 조롱당하는 걸 피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으리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정의당과 진보정치 전체가 온갖 비열한 비난과 공격에 노출될 게 분명했다. 고인으로선 어떻게든 그런 귀결을 피하고 싶었으리라.

고인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많은 숙제를 남겼다. 많이들 지적한 대로 고인 같은 정의로운 정치인조차도 불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정치자금법을 고치고 소수 진보정당의 정치적 입지를 옥죄는 단순다수결 선거제도를 바꾸는 일은 정말 절실하다.

[시사 2판4판]인기를 얻고 싶어요 (출처:경향신문DB)

나는 여기에 덧붙여 고인이 빠졌던 저런 종류의 덫을 우리 진보정치가 어떻게 깨트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성찰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도덕정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언젠가 어느 독일 학자로부터 왜 한국인들은 매사를 도덕화된 시각에서 접근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해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우리는 많은 정치적 문제를 곧잘 도덕주의적으로 접근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에 특유한 일로 유교, 특히 성리학적 전통의 영향이다. 여기서 정치는 기본적으로 어떤 도덕적 진리의 실현을 지향해야 하고, 정파들은 누가 또는 어떤 세력이 도덕적 올바름을 주장할 가장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두고 권력투쟁을 전개했다. 개인적으로도 ‘수신’과 ‘제가’를 완수한 사람만이 정치를 할 자격을 가졌다. 바로 이런 식의 도덕정치 전통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라고 해서 정치에서 도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독일에서도 크리스티안 불프 대통령이 사소한 잘못 때문에 여론의 압력에 밀려 사퇴한 적이 있었다. 그가 친구의 도움으로 시중보다 싼 이자로 은행 대출을 받았다는 따위가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그 자체보다는 그가, 사실은 실질적 권력도 별로 없지만, 대통령이라는 공적 지위를 부당하게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한국에서는 다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떠올려 보라. 대부분 청문 대상자의 공적 업무 능력이나 공동선에 대한 태도 같은 게 아니라 위장전입에서부터 논문 자기표절이라는 시시콜콜한 혐의까지 개인적인 도덕적 흠결을 따진다.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도덕정치의 전통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일은 아니다. 멀리는 독립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을 거쳐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정의에 대한 강렬한 지향은 우리 민주주의의 비옥한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특히 늘 권력과 사회적 기득권에 맞서서 싸워 왔던 진보정치는 이 도덕정치 전통의 정수를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의 그림자 또한 너무 짙다. 특히 진보정치에 대해서는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진보가 스스로에게 도덕적 완전성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바람에 반대 세력이 너무 손쉽게 이를 역공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자기 눈 안의 들보를 숨긴 자들이 진보 인사들의 눈에 있는 티를 가지고 시비를 걸어도 꼼짝없이 말려들고 만다.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과 예의조차 없이 비열한 정치적 술수로만 사용되는 ‘비도덕적 도덕주의’가 난무해도 속수무책이다. 이번의 드루킹 사건만 해도 그렇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온 건 그냥 약간의 소란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을 일을 끝까지 파헤치자고 나섰던 민주당의 어떤 도덕정치적 강박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진보부터 나서 정치에 너무 과민한 도덕주의적 촉수를 갖다 대는 습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적인 정치가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요점은 도덕의 초점을 개인이 아니라 공공성과 공동선에 대한 지향에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인간적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포용적이되, 공적 질서의 원칙에 대해서는 엄정한 새로운 정치도덕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에서 도덕적 우월성보다 더 중요한 다른 가치가 참 많다. 성리학의 시대는 진작 끝났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정치 비평 > 장은주의 정치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극적 평화’를 위하여  (0) 2018.10.10
입시만이 교육문제가 아니다  (0) 2018.09.04
도덕정치의 덫  (0) 2018.08.07
민주당, 어디로 갈 것인가?  (0) 2018.06.12
우리 안의 냉전부터 끝내자  (0) 2018.05.15
깊은 민주주의  (0) 2018.03.2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