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를 출발한 대통령 일행이 자유로를 타고 판문점까지 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공중의 카메라는 건방진 건물들을 납작하게 만드는 한편 아무 걱정 없이 북으로 뻗어나간 숲을 융단처럼 푹신하게 담아내었다. 연두에서 초록까지, 색의 파노라마로 일행을 호위해주는 좌우의 나뭇잎들을 보자니 우리 사람의 일이란 작든 크든 결국 이 식물들의 손바닥 안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실감했다. 1953년생 소나무를 심고 난 뒤, 남북의 두 정상이 주위를 물리친 채 숲속에서 다정한 도반처럼 말, 표정, 손짓을 섞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도보다리 바로 곁에서 빵긋 웃는 건 조팝나무, 바람을 영접하는 건 갈대, 낮말을 알아듣는 건 버드나무이지 않을까.

한반도의 계절과 정치에 실질적인 봄이 오는 것을 체감하면서 많은 이들이 평양냉면을 이야기할 때 나는 하나 더 물목을 추가하고 싶었다. 웬만한 술꾼들은 알겠지만 냉면은 안주로도 정말 제격이니 이에 어울리는 들쭉술을 빠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생각은 백두산으로 곧장 달려갔다. 야생화에 입문하고 이듬해 떠난 꽃산행. 남에서는 주로 고산지대에서 겨우 자생하는 북방계 식물들이 그곳에서는 발에 차일 만큼 흔했다. 그중에서도 파르라니 깎은 듯 푸르디푸른 건 들쭉나무 열매였다. 한 주먹 따서 입에 넣으면 들쭉술의 원액인 듯 볼을 빨갛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던 들쭉나무.

토요일의 임진각은 공기부터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특산물코너로 갔다. 들쭉술 있습니까. 그간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물건을 못 받았어요. 가게 주인은 두 손을 모으며 미안해하면서도 설레는 기대를 감추지 아니했다. 우리 대통령은 다시는 이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다 하셨다. 내 혀끝으로 먼저 북녘과 화끈하게 접촉할 날도 머지않았으리. 들쭉나무는 빙하기 때 백두대간을 거쳐 제주도까지 내려왔다가 온난화가 진행되자 한라산, 설악산의 꼭대기로 빨치산처럼 피신한 나무이다. 작년 설악산에서 만난 들쭉나무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그 야무진 꽃을 떠올리며 파주-개마고원-백두산으로 이어지는 꽃산행 길도 그려보는 흐뭇한 봄밤! 들쭉나무, 진달래과의 낙엽소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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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