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본 임화의 작품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는 읽어 내려가기조차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한자어는 한자어대로 난해하고, 구미에서 막 건너온 외국어 고유명사는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도 난삽하기 그지없다. 말풀이부터 해보아야 할 판이다.

먼저 이 까다로운 한자 흐리다” “구름이 끼다의 뜻이며, “명일命日은 곧 기일忌日이다.

작코반제티는 오늘날의 한국어 문법상의 표기법에 따르면 니콜라스 사코Nicolas Sacco와 바르톨로메 반제티Bartolome Vanxetti이다. 이탈리아 출신 구두 수선공 사코와 생선 장수 반제티는 고국에서의 생활고를 견딜 길이 없었다.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자로서 평범한 일상을 지냈으나 19204월 미국 매사추세츠의 한 제화 공장에서 일어난 살인강도 용의자로 체포된다. 회계 담당자와 공장 수위가 총에 맞아 숨지고 종업원들의 급료가 탈취당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일이 이렇게 크고 끔찍했는데도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하는 증인, 증거가 나왔어도 법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사코와 반제티는 살인강도로 몰린 채 햇수로 8년이나 구금되어 있다가 192749일 메사추세츠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3823일 전기의자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두 사람의 경우는 곧잘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린다. 이들에 대한 동정, 미국 법원을 향한 항의는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임화의 시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에 나오는 제1의 동지에서 제8의 동지에 이르는 항의는 그저 좌익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에 한하지 않았다. 불의를 참지 못한 많은 미국 시민들이 항의를 조직했고 이사도라 덩컨 같은 유명인도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일기는 흐렸다. 사코와 반제티는 미국과 세계의 구명운동을 뒤로 하고 잔뜩 구름 껴 답답한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조선 시인 임화에게도 비상한 인상을 심어 주어 이와 같은 작품을 낳게 했다.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전기” “발전들은 사코와 반제티가 전기의자에서 목숨이 끊긴 사실과 잇닿아 있다. 발표 지면 <예술운동>의 부기에 따르면, 임화가 이 시를 탈고한 때는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되고 닷새가 지난 1927828일이다.

또 하나 문맥을 세심히 따라갈 부분이 있다. “-가 각각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Ruxemburg, 1871~1919)를 가리킨다는 점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우경화, 전쟁 예산을 통과시킨 행태(1차세계대전 전비) 들에 반기를 들고 새로이 스파르타쿠스 단을 결성해 결국 독일공산당으로 발전시킨 비타협적인 운동가, 조직가다. 이들은 의회 안에 안주한 독일사회민주당과 결별했으며 노동자-병사소비에트를 정점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하다 1919115(추정) 독일 군부와 손잡은 극우파 민병대에 의해 학살당하고 만다앞서 소개한 시행의 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2인터내슈낼은
드듸어 兩同志救命아메리카위원회의 전세계 노동자의 쩌너랠 스트라익의 희망을 謀叛하였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힘이 아니다
푸로레타리아의 조직이 아니다
룸펜 인테리켄차의 허울조운 逃避窟이다.

우리들은 새롭은 힘과 계획을 가지고 戰場에로 가자
우리는 작코, 반젯틔를 죽인 電氣發電者가 아니냐

[중략]

그러고 우리들은 發電을 하자
우리의 戰列의 새로운 힘을 보내기 위하야
동모여 그놈들의게 생명을 도적맞인 우리들의 사랑하는 前衛
조금도 염려는 말어라
뒤에는 무수한 우리가 있지 않느냐
가장 위대한 세계 푸로레타리아트의 조직이
_임화,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에서


2인터내셔널은 초기 사회주의운동 명망가들이 대거 참여한 사회주의 정당 협의 기구이다. 1차세계대전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목숨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도 분열시켰다. 2인터내셔널은 파행 끝에 1919년 부활하지만 러시아공산당이 주도해 19193월에 결성된 제3인터내셔널 곧 코민테른에 의해 격렬한 공격을 받는다. 당시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배신자로 비난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압도해 나갔는데 임화의 시구는 이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임화는 일찍부터 영화에 눈뜰 정도로 감각이 있었고, 사코와 반제티 운명의 날과 별로 시차가 많이 나지 않는 창작을 할 만한 감각도 있었다. 이 시를 쓸 무렵, 임화는 변변한 공산주의 운동 경험이 없는 식민지 무명 시인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구와 빡테리아’>에서 보듯 거칠 게 없었다. 임화는 전위前衛운운하며 제3인터내셔널에 기대 1”에서 8”에 이르는 국제연대를 줄줄이 호명했다. 거칠 게 없었고 겁날 게 없었다. 그 감 그대로, 임화는 시 <우리 오빠와 화로><현해탄>으로 달려갔다. 평론은 전위적인 만큼의 극좌 방향으로 길을 잡고 달려갔다. 임화는 박영희를 젖히고 김기진을 젖혔다. 당시 임화보다 선명하고 붉은 이론전을 펼친 투사는 없었다. 그러나 임화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평론가 유종호의 글을 빌린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신문으로 전해지는 외국의 사례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은 시의 계기가 지식인의 관념 속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우리의 현실에서 직접 촉발된 것이 아니고 풍문을 통해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어떤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직접성의 결여는 일본의 당대 극좌파 논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임화의 실천비평에서도 엿보이는 한계라 할 수 있다.”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에 부친 문단이지만 임화의 활동 전체, 글 전체를 들여다볼 때에도 떠올릴 만한 글이 아닐까 한다. 치고 나간 것 자체가 장쾌한 노릇이라고 한다면 다음 의논은 어떻게 이어야 할까. 임화는 서둔 만큼 빈 구석도 많았고 풍문 너머의 1차 자료에 육박하는 지적 성실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내실 없이 허둥대다 결국 일제가 주는 정보에 갇혀 일제에 부역했고 해방공간의 남북한에서 기회주의로 의심받을 만한 행태를 보였다.

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을 재판해 임화를 비롯한 남로당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야비하고도 저열한 놀음은 그것대로 욕을 먹어 마땅하지만 임화의 1941년 이후 행적을 어찌 상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연구자들이 애써 작성한 임화 연보를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을 지었다 무너뜨린다. 임화의 돌진, 과속, 허둥지둥 들에서 시대의 어떤 징후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아서다. 뭔가에 지펴 막 시작하던 임화의 진정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1938, 절창 <현해탄> 머리의 두 연에 이렇게 집약된다.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치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_임화, <현해탄>
에서

어린 사슴에게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사슴들은 거친 들로 달려갔다. 이때까지만의 연대기가, 연보가 상쾌한 문학사가 있다. 한국 문학사의 많은 인물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그런 연대기를 남겼다. []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 왔다. 오른쪽이 사코, 왼쪽이 반제티.
*“쩌너랠 스트라익제너럴 스트라이크general strike” 총파업을 말한다. 1920~1940년대 저널리즘에 보이는 쩨네스트” “쩨네-스트들도 제너럴 스트라이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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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