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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 오른다. 길을 돌아들 때마다 커다란 바위가 툭툭 튀어나왔다. 그 면면마다 바깥으로 나올 준비를 한 채 숨어 있는 부처님들. 하늘이 재주를 주고 세상이 끌을 손에 쥐여준다면 우리 시대의 표정을 발굴할 수 있겠다는 허무맹랑한 궁리도 해보다 드디어 금오봉 정상에 섰다. 경주 남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무기능선과 도깨비능선을 사이에 두고 멀리 고위봉이 눈썹을 때린다. 이런 곳에 서면 퍽 이상하다. 해발로 따지면 고위봉이 금오봉보다 조금 더 높다. 하지만 금오봉에 내 키를 더한 때문인지 여기가 더 높은 듯하다. 왜 우리는 자기가 있는 자리를 가장 높다고 여길까. 지금 여기가 가장 높다는 이 엄연하고도 즐거운 착각! 지구가 편평하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크게 휘어지는 지평선과 함께 지구가 둥글다는 한 증거로 삼을 수 있으리라.

고위봉을 지나 남산의 산중에 있는 식당을 향해 가는 길. 중간에 백운암에 들러 목을 축이다가 이런 글귀를 만났다. “꽃은 늘 웃고 있어도 시끄럽지 아니하고 새는 늘 울어도 눈물을 보이지 아니하고….” 한참을 걸었더니 천룡사 폐사지에 삼층석탑만이 우뚝하다. 이윽고 말라버린 나무덤불 사이로 화살표가 나타났다. ‘녹원정사식당’. 석탑을 쌓는 시대가 있는가 하면 고작 이런 간판이나 갖다붙이는 시대도 있는가 보다.

꽃이 없는 계절에 꽃 대신 꽃으로 시작하는 문장 하나를 주웠으니 그래도 다행이구나, 하려는데 발길이 멈추었다. 식당 울밑에 관상용으로 심어놓은 만년청이었다. 이 싸늘한 계절에 상록의 잎을 배경으로 꽃만큼이나 매혹적인 열매가 그래도 반가웠다. 야생의 만년청은 제주도나 대마도에서 본 적이 있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골짜기가 용장계곡이다. 그 골짜기에 웅크리고 은거해서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썼다고 한다. 오늘 식당에서 내가 읽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산채정식 6000원, 촌두부 4000원, 도토리묵 4000원, 남산신선주 7000원…. 요금은 선불입니다.” 그나마 마지막은 만년청을 떠올리며 슬쩍 마무리해서 다행일까. 이 대명천지에 등불처럼 열매가 피어나는 만년청,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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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