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 ‘망루’에 오른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송전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2013년 2월26일, 평택의 쌍용차 공장 맞은편 송전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쌍용차 해고자들을 찾았다.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99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던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문기주 정비지회장, 복기성 비정규직 수석부지회장의 건강검진과 치료를 위해 송전탑을 찾은 의료진과 동행했다.

덜컹거리는 크레인을 타고 오른 송전탑에 설치된 천막은 좁고 불안정했다. 천막 벽에 붙어 있던 쌍용차 관련 신문 기사들, 한 전 위원장의 동상 걸린 발에 신겨 있던 분홍색 수면양말, 힘차게 말하던 도중에도 스치듯 지나가던 굳은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한 전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쌍용차 갈등을 해결해 대통합 정치의 첫발을 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71일을 송전탑 위에서 지낸 그는 지금 감옥 속에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바닥과 벽, 비닐을 뚫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딛고 있을 단단한 땅이 없다는 데서 오는 아득함. 그런 풍경은 내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새벽 찬 공기 속에 남 몰래 송전탑을 올랐던 해고자들이 느꼈던 분노와 좌절감에 대해서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고작 몇 시간을 그곳에 머물렀던 나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고공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이 떠오른 건 김지은씨 때문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폭로하기 위해 JTBC 뉴스룸에 나온 김씨의 모습은 훅 불면 꺼져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뉴스룸으로 나왔다고 했다.

어쩌다 JTBC 뉴스룸이 성폭력 피해자들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을까. 김씨가 뉴스룸에 나오기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직장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묵살’됐다. 안 전 지사는 ‘미투 운동’을 언급하며 미안하다고 한 그날에도 성폭력을 저질렀다. 김씨를 구제할 시스템은 그곳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뉴스룸에 나오는 피해자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처벌하고 막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억울함을 더 이상 호소할 곳이 없어 하늘에 오른다. 망루는 그들에게 허용된 마지막 싸움터다. 성폭력 피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법체계가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폭로를 택한다. 망루에 오른 노동자들에게 불법점거, 업무방해 등의 압박이 가해지듯 성폭력 피해자들 역시 무고와 명예훼손 압박에 시달린다. ‘꽃뱀’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2차 가해가 이뤄진다. 김씨 역시 ‘합의한 관계이며 정치적 의도가 있는 폭로’라는 소문이 퍼지며 2차 피해로 고통받고 있다.

“‘그 길을 택하면 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끔찍한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내 삶이 갈가리 찢길 테고, 내 생활의 모든 것이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날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런 사건은 피해자가 이기기 가장 힘든 종류라고 했습니다.” 미국 몬태나 대학교 성폭행 사건을 다룬 르포르타주 <미줄라>에서 피해자가 변호사로부터 들은 말이다. 지금 성폭력 폭로라는 망루에 오른 피해자들이 맞딱뜨린 풍경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이 서 보지 못한 곳의 풍경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타인이 선 곳의 풍경이 어떤 지를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여성으로서 겪은 성차별, 성폭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해고자·성소수자·이주민들의 고통은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을 오롯이 들어야 하며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성폭력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와 고통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합의’니 ‘의도’니 함부로 말하길 멈춰야 한다.

노동자들이 망루에 오르는 것을 막는 방법은 하나다. 부당한 노동권 침해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위태로운 성폭력 폭로를 멈추는 방법은 단 하나다.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감수한 폭로를 하지 않고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 성폭력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미투 운동’은 저 너머로 가기 위한 과정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성공한 고공농성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309일간의 싸움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크레인에 오른 그는 두 발로 걸어서, 양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땅으로 내려왔다.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을 찾은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씨를 비롯해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망루에 올라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안전하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도 결국 우리의 몫이다.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고 성폭력을 방지할 시스템을 만들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것 말이다. 나는 눈감지 않겠다.

<이영경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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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