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도 가을이었나보다. 올해 발간된 <기획된 가족>의 계기가 됐던 박사논문 마무리에 여념이 없던 때였다. 1년간의 열정적인 사랑을 끝낸 친구가 외국으로 명상여행을 떠난다는 전화를 했다. 


“주은아, 네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 있잖아, 이제 중산층 맞벌이 부부는 경제적 동맹자라며? 그 경제적 동맹자 앞에서 내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남편과 나름대로 잘 살아가던 친구가 옛 남자친구의 연락을 받고는 눈먼 사랑이 시작되었다. 총명하기 그지없던 전업주부 친구였다. 교양있고 약간은 쿨한 듯하던 그 친구가 사랑에 빠져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해버렸다. 자기가 사귀던 남자의 부인에게 전화해서 “당신의 남편은 나를 사랑한다. 왜 이혼하지 않느냐”는 말을 해버렸다. 결국 내 친구는 “난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혼할 생각은 없다”는 남자의 말을 듣고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리고 나름 아픈 사랑을 끝내고는 외국으로 떠났다.



우리 사회에서 19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경제적 가치가 특권화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휴대폰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도 가세해 속도경제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것도 이 즈음이다. 전 국민은 40대 명예퇴직, 대규모의 정리해고사태를 목격하기도 했다. 이제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 “돈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천민자본주의의 가치가 사회를 휘감았다. 지하철의 대학생은 <10년 안에 10억 버는 법>을 밑줄 치며 읽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취업고시 합격투쟁’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본격적으로 취업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대학교는 학내민주화 등의 요구를 담은 현수막 대신 각종 어학원 광고물과 취업합격생 축하 현수막들이 뒤덮고 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20대 중반의 “신부수업 중인 여성”은 중매시장에서 나름 매력적인 ‘예비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상업적 결혼정보업체에서 직업 없는 여성은 회원으로 받아주지도 않는다.


무한경쟁사회에서 고용 없는 경제성장, 청년실업, 노후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서로 맞물려 경제적 가치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게 만들고 무소불위의 특권을 갖도록 하고 있다.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는 노동을 하는 맞벌이 부부는 경제적 동맹자로 자리 잡고 있고, 경제력이 없는 자는 사랑에서도 상처를 받기 쉬운 위치에 서기 싶다. 특권화되는 경제가치 속에서 사회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매우 고되고 힘든, 그렇지만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가사노동·돌봄노동과 관련된 시간은 특정한 행위와 관련된 시간의 위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게 된다.


가사노동 중에서도 밥하고 빨래하며 청소하는 시간은 큰 감정노동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노동과 관련된 시간, 이러한 노동분담을 둘러싸고 갈등하는 시간을 매우 불필요할 뿐 아니라 가치없는 시간으로 의미부여한다. 중산층 맞벌이 부부는 경제적 자원을 활용해 맞벌이의 오래된 숙제였던 가사노동을 둘러싼 갈등을 외주화시키고 있다. 대화시간은 늘 부족하고 섹스리스이지만 중산층 부부는 경제적 동맹자로서의 부부관계를 돈독히 해가고 있다. “여보, 사랑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지만 급여지급일은 험난한 세상을 끌고가는 동맹자로서 암묵적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다.


이처럼 특권화되는 가치 속에서 부부관계의 특성도 변화되고 있고 가사노동의 가치는 폄하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부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전면적으로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사회가 전면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외국으로 갔던 제 친구는 어떻게 됐냐고요? 제 친구왈, “우리 부부는 더 좋아졌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부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두 루저(loser) 간 동맹자 관계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단다.” 친구는 쿨함을 되찾았다. 정말이지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기획된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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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