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에 갔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로 더 들어갔다.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과 아직도 살아있는 나무들을 더듬어보겠노라, 정문을 통과했다. 포로라니! 듣도 보도 못한 신분으로 죽기 일보 직전의 삶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 어떡하겠는가. 아수라 같은 곳에도 때는 꼬박꼬박 찾아와서 떼를 지어 밥을 먹고 중인환시리에 용변을 보아야 했다. 그러고도 오늘날까지 그 장면이 적나라하게 전시되고 있는 고약한 운명이었다.

자료관에 들렀다. 수용소 철조망의 경고판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NO TALKING OR PASSING OF ARTICLE BETWEEN THE FENCE 철망 넘어로 말 혹은 물품을 교환치 말 것.” 그 사진을 보는데 이곳에 잠시 수용되었던, 영어를 잘했다는, 말을 아주 잘 다룬 어느 시인 생각이 났다.

사람은 곤죽이 되어도 산천은 의구하다. 혹 당시를 지켜본 나무가 있지 않을까. 포로들과 사람들 사이로 휩쓸리는 동안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관광지로 조성된 곳이라 식재된 관상수가 대부분이었다. 당시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 나이 지긋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의 수피며 굵기며 자태로 볼 때 최근에 심은 나무는 분명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처음 보았을 때 구슬처럼 알록달록한 연보라색 꽃을 피운 나무. 지금 한겨울에는 총알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장착하고 있는 나무. 멀구슬나무였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전봇대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포로수용소에도 철조망 따위는 훌쩍 건너뛰어 전봇대가 있었다. 전봇대는 무슨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저렇게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는가. 고향으로 연결된 포로들의 간절한 눈빛을 그 전봇대는 얼마나 받아냈을까.

휘적휘적 걷다보니 유적지 내 철조망에 화살표와 함께 <출구> 표시가 나왔다. 수용소에서의 짧은 한나절이었지만 여느 곳과는 색다른 의미와 교환되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틀림없이 그때의 나무일 것 같은 멀구슬나무.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제시 고현동 362번지의 포로수용소에서 오래 거주해 온 멀구슬나무를 네 번 뒤돌아보았다. 멀구슬나무, 멀구슬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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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