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동 유치원’은 하나의 대명사가 될 듯하다. 안전불감증, 무사안일주의, 개발주의가 응축된 대명사. 위태로운 흙 낭떠러지를 옆에 두고 기우뚱 옆으로 무너진 건물은 ‘유치원’이라는, 건물의 외양과 부조화를 이루는 이름과 만나 더욱 극단적 느낌을 자아냈다. 건물이 한밤중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면 정말 참혹한 결과가 초래됐을 터였다.

유치원 측에서 이미 이상징후를 포착하고 공사업체에 항의했지만 공사업체는 무시했다. 구청에서도 제대로 된 현장 점검조차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건물을 두고 아무도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도동 유치원은 결국 철거되어 폭삭 무너져내렸다.

인근 공사장의 흙막이가 붕괴되면서 건물이 기울어진 서울 동작구 상도유치원에서 사고 닷새째인 10일 파손된 부분의 철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무너진 유치원을 보고 퇴근하던 날, 내 삶의 지반에도 균열이 느껴졌다. 전염병에 걸려 어린이집을 일주일째 가지 못하고 있는 아이가 길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할머니·할아버지와 집에만 계속 있자니 답답하고 지겨웠던 것 같다. 할머니 손을 잡은 아이를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가 돌볼 수 있어야 한다’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휴가를 내기 힘든 상황에서 아이는 전적으로 조부모의 손에 맡겨졌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노년에 접어든 조부모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이 무너진 건물 틈으로 훤히 드러난 유치원 내벽처럼 선명히 드러났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내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기 위해 남의 가랑이를 찢어져라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내 삶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이제 점점 늙어가는 조부모의 노동이었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누군가의 노년을 착취하면서 바늘 하나 꽂힐 여유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모르고, 대책 없이 맞이했다. 미리 알았다면, 그때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이것은 내 모성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이다.

무너져내린 유치원을 보면서 매번 최저치를 갈아치우는 출산율이 떠오른 건 그래서다. 올 2분기 합계출산율은 0.97명을 찍었다. 정부가 내놓는 ‘저출산 대책’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출산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여성의 삶이 근본적으로 좋아지지 않는다면 출산율은 오르지 않는다. 성평등지수가 높은 북유럽 국가에서 출산율이 높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그러니까, 출산을 하는 여성의 자궁과 여성의 삶을 분리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삶은 얼마나 종합적인가. 각종 성차별, 남녀 임금격차, 여성의 높은 비정규직 비율, 유자녀 여성이 겪는 직장에서의 보이지 않는 차별 등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임대주택 몇 채와 출산수당으로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1야당 원내대표가 ‘출산주도성장’을 대안이랍시고 이야기한다. 출산장려금 2000만원, 출산수당 1억원을 지급하자는 것인데, 논박하기도 입이 아프다. ‘출산주도성장’은 출산율 하락 위기에 대한 안전불감증과 성장중심주의가 결합한 가장 천박한 형태의 말이다. 여성의 몸을 출산의 도구로 환원시키며, 아이를 낳는 여성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성의 변증법>을 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1970년대에 비혼이나 저출산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미 젊은 여성들은 ‘비비탄(비혼 비출산 탄탄대로)’을 삶의 전략으로 택하고 있다. 정상가족 중심의 복지제도, 남녀 임금격차 등을 생각하면 ‘비비탄’의 앞길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이 가져오는 여성의 삶의 변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출산율은 그 결과다.

무너지는 것들은 장기간에 걸쳐 이상징후를 드러내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출산율에 관하여 우리 사회는 이상징후를 여러 차례 보냈다. 무너진 유치원이 되지 않으려면, 근본적 해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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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