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카메라로 힘껏 찍어보지만 시간의 강물이 어느 서랍에 처박을지 그 허망한 기억을 어이 믿을 수 있겠나. 하지만 야생화에 입문하고 천마산에서 처음 본 꽃들은 아직도 뚜렷하다. 그때의 공책을 뒤적이면 다소 생소한 이름과 함께 이런 간략한 설명이 있다. 좁은 바위틈, 그 깊고 컴컴한 허방을 짚고 자라는 매화말발도리… 기특했다.

적어도 꽃이름 100개는 중얼거리자고 시작한 꽃산행, 그것으로 끝낼 수가 없었다. 높든 낮든 산행을 끝내고 골짜기를 빠져나오면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에 젖어들기도 했다. 비록 하루 만의 일이지만 산이 배출한 졸업생이라는 자부심은 또 한 주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좋았다.

매화말발도리는 주로 바위를 딛고 살아간다. 바위는 햇빛은 쉬이 섭취하겠지만 비는 저축할 겨를도 없이 흘러가는 장소이다. 왜 이 나무는 이런 불리한 조건에 거처를 정한 것일까. 나무는 바위에 초라하게 빌붙기는커녕 아예 바위를 쪼개기도 하면서 악착같이 자란다. 그 기세에 자주 눈길이 가다가 매화말발도리와 비교되는 바위말발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은 아주 비슷하지만 가지 끝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고 했다… 궁금했다.

몸에 뼈 있듯 산에는 바위 있다. 으레 바위는 매화말발도리를 품고 있었다. 바위 앞으로 갈 때마다 바위말발도리가 간절해졌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바위말발도리가 자주 출몰한다는 연천의 고대산으로 가는 길. 제2등산로를 오르자 엉거주춤 그러나 아주 편하게 앉아서 이제 오느냐며 반겨주는 바위가 있다. 그 바위가 거느리고 있는 깨끗하게 흰 꽃을 보는데 감이 왔다. 맛있는 알사탕을 빨아먹겠다는 심정으로 바위로 접근하여, 바위에 이끼처럼 착 달라붙어, 꽃을 관찰하였다… 과연!

매화말발도리는 작년 가지, 바위말발도리는 올해 가지에 꽃을 내놓는다. 새것은 새로워서 좋고 묵은 건 묵어서 더욱 좋다.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둘을 구별하는 그 결정적이고 우주적인 차이, 바위말발도리의 가지 끝에서 나는 그만… 까무러쳤다. 바위말발도리, 수국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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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