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당선이 확정된 2012년 12월19일 밤은 제게 악몽이었습니다. 저는 명륜동의 한 주점에서 이튿날 아침까지 술을 마셨고, 만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거실 바닥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깨어보니 땅거미가 내려앉았더군요. 제 처 말로는 몇 번이나 깨워 안방으로 들여보내려 했지만 제가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어나서도 당신의 당선이 말 그대로 꿈이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낙선을 바랐습니다. 제가 자연인 박근혜에게 무슨 미움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될 경우, 한국 민주주의의 파괴자였던 당신 아버님이 역사적으로 복권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민주주의적 집권이 당신 아버님의 역사적 복권으로 해석되는 것은 당신이 그의 생물학적 딸이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당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어서입니다. 끔찍이 우울했던 그해 겨울에, 저는 당신에게 가장 먼 곳에 있고 싶어서 제주도에서 몇 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5·16도로’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당신 아버님의 질긴 흔적에 아연했습니다.



당신의 당선 확정 뒤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신은 순수하게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는 당신의 당선을 위해 거침없이 불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맞상대였던 후보는 당신의 당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성급하게 선언했고, 다만 대선에 간여했던 공무원들의 처벌만을 원했습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의 당선을 정당화해주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집권 뒤 공무원들의 대선 간여를 파헤치려는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파헤쳐 그를 쫓아냈고,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 공무원들 가운데 몇몇은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이제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의 낙선을 바랐던 사람들 가운데는 당신이 실정을 거듭해 당신 아버님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달랐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당신 아버님에 대한 미움 때문에 당신의 실정을 바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훌륭한 대통령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것이 제가 미워하는 당신 아버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당신의 화사한 민주주의 공약들이 지켜지기 바랐습니다. 당신 치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퇴행이 멈추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당신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6월 시민항쟁이 탄생시킨 제6공화국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나날이 신장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까지 이런 추세는 불가역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처를 입었고, 당신 정권에서는 거의 반동이라 부를 만한 퇴행을 겪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약은 죄다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의 지표에서, 이 정권은 10년간의 민주당 정권에 견줘서는 물론이고 이명박 정권에 견줘서도 뒷걸음질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의 가장 큰 이유가 당신의 폐쇄적 리더십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앞선 정권들이 구축해 놓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를 수익 모델로 여겼다는 비판을 받은 이명박 정권도, 공영방송사를 사유화한 걸 빼놓고는, 대한민국 시스템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 정권 들어서는 국가의 의사결정구조가 사유화되었습니다. 어느 정권에서 청와대가 각 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에게 직접 전화를 해 자잘한 인사에까지 간여했습니까? 어느 정권에서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배신의 정치’ 운운함으로써 여당 원내대표를 쫓아냈습니까? 당신 정권에서 여당대표나 원내대표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 정권에서 장관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 스스로는 청년실업문제를 방치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청년실업 대책을 방해하는 일 정도는 장관이 할 수 있군요.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GDP(국내총생산)가 한 나라 경제의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주진 않을지라도, 당신 치하에서 GDP 성장률은 민주당 정권들에 견줘 사뭇 낮아졌습니다. 출산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당신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외쳐 봐야, 젊은이들에게는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할 여력이 없습니다. 청년실업률이 외환 위기 이래 처음으로 10%를 넘어섰습니다. 제6공화국의 성립 이래 역대 정권 첫 3년 동안 기록한 재정수지적자와 국가채무의 증가액이 당신 정권에서 모두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가계부채는 급증하고, 법정 최저임금 미달자도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기록 깨기 정권입니까?

물론 당신 정권이 모든 한국인에게 지옥인 것은 아닙니다. 중소제조업의 평균가동률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재벌 기업의 매출총액과 자산총액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견줘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제가 일일이 수치를 들이대지 않는 것은 당신이 수치 읽기에 약하리라는 짐작 때문입니다. 결례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쉬운 수치는 알려드리겠습니다.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RSF(국경 없는 기자회)가 해마다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네 해째 잇따라 내리막이었습니다. RSF가 지난 2월에 발표한 ‘2015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전체 조사 대상 180개 나라 가운데 지난해 57위였고 올해 또 세 단계 떨어져 60위에 머물렀습니다. 미국의 국제 인권감시 단체인 프리덤하우스도 우리나라를 ‘언론 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낮추었습니다. 이 단체는 또 우리나라의 정치적 권리를 9년 만에 1등급에서 2등급으로 내렸습니다.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은 또 뭡니까?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 맞습니까?

인사의 영남 편중에 대해선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청와대를 정점으로 한 모든 권력기관에서 영남방언이 표준어가 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첫 삽을 뜬 영남패권주의를 당신이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한 당신이 통일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남과 북 사이에 가동하고 있는 항시적 라인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사소하다면 사소하달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말버릇도 문제입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라거나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라거나 “잘못된 역사를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라는 말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사람 잡는 선무당의 입에서나 나올 소리입니다. “규제는 암덩어리”라며 “기요틴에 보내야 한다”는 말은 국가원수의 기품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당신의 경제 민주화 공약을 완전히 뒤집은 말입니다.

그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가 터진 것입니다. 그 참극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완전한 방관자의 것이었습니다.

거론하기 민망한 일이지만, 지난해 4월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 때 당신이 답변할 순서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아래만 보고 있던 게 생각납니다. 어떤 남자가 “대통령님!” 하고 당신을 불렀고, 그제야 당신은 고개를 들었죠. 오바마는 “가여운 박 대통령께서 질문이 뭔지 잊으셨군요”라고 농담을 했고요. 도대체 기자회견 중에 무슨 딴생각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지난 10월의 한·미 공동 기자회견 때도 동문서답으로 기자들을 당황하게 했고요. 그런 걸 보는 한국인들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그러나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당신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한마디 안 할 수 없군요.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들이 판단해야 한다”는 야당 대표 시절 당신의 말을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당신의 가족사로 여긴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효녀입니다. 그러나 당신 방식의 효도는 대한민국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으로서 뭘 잘했나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 내용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써 봤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잘한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야당 하는 꼴은 어떻더냐고 당신은 반박할 수 있겠지요. 맞습니다. 지금 제1야당의 행태에도 칭찬해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격에 맞는 제1야당을 지녔고, 제1야당은 그들 격에 맞는 대통령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당신과 저의 조국을 ‘헬 조선’이라고 비하하는 것입니다.

밭은 스케줄 때문에 몸 상태가 늘 좋으시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전임 대통령의 국가장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항상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고종석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욕의 민휘에게  (0) 2015.12.27
천정배 의원께  (0) 2015.12.20
박근혜 대통령께  (0) 2015.12.13
놈 촘스키 선생님께  (0) 2015.12.06
최일남 선생님께  (0) 2015.11.29
파리 시민들께 위로와 연대의 손을 건넵니다  (0) 2015.11.2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