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은동 사저에서 청와대로 오갈 때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고 셀카를 찍었다. 기자들 앞에서 직접 국무총리·국정원장 내정자를 소개하고, 와이셔츠 차림에 참모들과 커피잔을 들고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눴다. 중·일 정상과의 통화에서는 각각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보복 중단과 위안부 합의 수용불가를 얘기했다. 역대정권의 비리 길목이던 청와대 총무비서관에는 일면식도 없는 경제관료를 임명했다. 북한 미사일 발사 대응은 일사불란했고, 그 과정은 언론에 공개됐다.

음습하고 밀폐된 요정에서 나와 사방이 트인 카페에 앉은 기분이 이럴까. 설령 보여주기식이라도 참신하고 산뜻했다. 겉으론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획일성, 편가르기, 일방통행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일변도였던 지난 정권의 모습은 아득한 옛날이 됐다. 국정교과서 철회 서명, 세월호와 정윤회 문건을 다시 들여다보겠다는 조국 민정수석의 발언에 화들짝 놀라며 불안해하는 듯한 기득권 진영의 몸짓도 흥미롭다. 아, 바뀌는구나.

평등하고, 정의롭고, 부패 없는 국가를 만들라는 촛불의 명령을 떠올리면 이런 모습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 그의 존재가치가 반드시 이런 분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존재가 더 명확히 드러나고 판가름 날 곳은 경제·사회 분야여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 중 으뜸이 불평등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불평등의 해소의 수단은 정책이다. 그는 ‘사람 중심’ ‘소득 주도’를 말한다. 사실 ‘사람 중심 경제’는 창조 경제만큼 모호해 보인다. J노믹스 설계자라는 김광두는 “사람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 개인의 경쟁력이 커지고, 이는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 각 가정의 소득이 올라간다”고 말한다. 프로세스는? 아직까지는 어렴풋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을 나서며 어린아이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에 비하면 ‘소득 주도 성장’은 상대적으로 명료하다.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의 소득을 늘려줌으로써 구매력을 확충해 이를 성장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경제개발협력기구식 표현을 빌리면 ‘포용적 성장’이다. 그 상징성은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인천공항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비정규직과 간접고용이 많기로 악명높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의 임금노동자 1900만명 중 비정규직은 3분의 1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급여는 정규직의 절반도 안된다. 그는 앞서 대통령직속으로 일자리위원회를 만들고, 비서실에 일자리수석을 두겠다고도 했다.

되돌아보자. 국가가 서민, 약자, 노동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적이 있었나? 늘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기득권 편향으로 귀결됐다. 과거 정부의 경제정책은 한결같이 대기업 중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민은 내팽개쳐졌고, 각자도생해야 했다. 보수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환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였던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에 밀려 노동유연성이란 이름으로 비정규직 활로의 물꼬를 터줬다. 노무현 정부도 권위는 내려놓았지만 결국 대기업이라는 강자와 타협했다.

그런 점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되돌리겠다는 그의 실험은 전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만간 선거 과정에서 제기됐던 여러 정책과 공약을 다시 가다듬은 국정과제와 그 구체적 로드맵이 나올 것이다. 이 안에는 공공일자리 81만개 창출을 비롯해 비정규직 감축 및 처우개선, 아동수당 지급, 대기업의 횡포 근절 등 여러 과제와 시행방안들이 담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세부 과제를 놓고 논쟁이 첨예화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이냐, 대기업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냐, 성장 없는 재분배가 가능한가 등의 문제제기도 쏟아질 것이다. 촘촘하게 계획하고, 지속적인 설득이 필요한 대목이다.

우려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슬그머니 기득권의 논리에 함몰돼 공동체의 가치에 눈감고 타협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난 정권들과 다를 게 없다. 재원이 부족하다면 증세 얘기를 꺼내야 한다. ‘세금을 더 내게 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며 얼버무리는 것은 비겁하다. 고성장에 대한 유혹도 끊어야 한다. 재분배는 성장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점도 강조돼야 한다. 최저임금을 배로 올린 브라질 룰라의 경험은 좋은 선례이다.

정권이 바뀐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이 바뀐다는 것일 게다. 더구나 그것이 사회적 약자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면 좌고우면할 필요는 없다. 하루아침에 모든 걸 이룰 수는 없지만 불평등을 바로잡겠다는 신호는 지속적으로 보내야 한다. 끊임없는 신호만으로도 기득권은 불편해하고 긴장할 것이다. 바뀌는구나가 바뀌었구나로 바뀌는 시점은 바로 그때이다.

박용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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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