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실상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대중음악인이 웬 문학상, 그것도 천하의 노벨 문학상을?” 하고 놀랄 법도 한데 놀라기는커녕 “음, 언젠가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말았다. 스웨덴 한림원이 노렸듯이 논란을 일으킬 만한 파격은 파격이되, 아는 사람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다소 ‘뻔한 파격’이었다고 할까?

내가 아는바 미국에는 일찍이 ‘딜런학(Dylanology)’이라는 학문이 있었다. 이 학문은 1960년대 전성기를 누린 ‘밥 딜런’이라는 뮤지션의 가사와 철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보다 지적으로 ‘으쓱’하고픈 대중문화인, 혹은 대중문화 애호가를 위한 것이며 그쪽 방면에서 밥벌이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 같은 것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밥 딜런은 실제로 대학의 정식 커리큘럼으로 등장한 최초의 대중음악인이었으며, 그를 존 업다이크나 셰익스피어에 비견하며 노벨 문학상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일찍부터 진지하게 검토됐다.

물론 그건 ‘세상을 바꾼 가장 뛰어난 대중문화 1위’라는 거창하기 짝이 없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만큼 밥 딜런의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이 엄청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쓴 가사가 마치 무슨 프랑스 상징주의 시처럼 매우 그럴듯하게 난해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밥 딜런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냥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를 좋아하는 범인의 취향 그 이상의 무엇, 보다 심오하고 지적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밥 딜런을 유독 대단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한편 그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준비한 2016년 노벨상 수상 축하연은 물론 시상식조차 불참한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심각한 이유가 아니라 단지 ‘선약’ 때문이라니 얼마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시원한 대답인가? 역시 밥 딜런이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밥 딜런다운 것인가? 내가 아는 밥 딜런은 나 자신을 속박하는 타인의 기대를 가차 없이 걷어차는 인물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 대상이 가족이었던 십대부터. 예술을 정신적 타락으로 치부하는 유대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시집을 읽고 노래를 부르다 못해 아예 아버지를 갈아 치운 인물이라고 할까? 실제로 좋아하던 시인 토머스 딜런의 성을 따서 이름을 ‘로버트 짐머먼’에서 밥 딜런으로 바꾸는가 하면, 우디 거슬리라는 포크 가수를 좋아해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고백이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에 써 있다.

‘노래하는 저항 시인’으로 추앙받기 시작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중을 위한 저항 시인으로 살았던 건 아주 잠깐뿐이었고, 그 이후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가두는 그와 같은 수식어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저항’이라기보다는 ‘배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1965년 5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무대가 그 정점이었다. 밥 딜런은 느닷없이 통기타를 버리고 처음으로 전기기타를 들고나와 야유하는 관객들을 향해 ‘나는 너희 거짓말쟁이들을 믿지 않는다’며 악기를 부술 듯이 연주하고 공연을 끝까지 마쳤다. 나는 진정 반했다. 밥 딜런이라는 예술적인 반항아에게. 한마디로 그는 한바탕의 소란과 배신으로 신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밥 딜런을 잘 담아낸 영화가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만든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다. 자신이 흠모하는 문화적 취향을 향해 계속 변화하고 변형하는 존재, 하나의 밥 딜런을 죽이고 다른 밥 딜런으로서 새 삶을 사는 존재인 그에게 집중하는 영화답게 ‘당신이 생각하는 밥 딜런은 거기 없다’는 뜻의 제목이 달렸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노벨 문학상 그까짓 것 주면 받겠지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밥 딜런의 문학적 재능이나 성취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는 바이런과 셸리와 롱펠로와 에드거 앨런 포와 랭보의 시를 사랑한 청년이었다. 그 덕분에 노래하는 훌륭한 시인이 되었다. 그의 노랫말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소설보다 혹은 랭보의 시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예컨대 굳이 지적인 해석이 필요 없고 그저 글자 그대로 느껴지는 정서만으로 멜로디와 함께 지상의 그 어떤 시보다 더 멀리 공명하는 이런 노랫말들.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기분이 어때/ 집 없이 사는 것이/ 알아주는 사람 없이/ 구르는 돌처럼 사는 것이?”

밥 딜런에게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안긴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바람만이 그 대답을 알지(Blowing in the wind)’와 ‘구르는 돌같이(Like a rolling stone)’의 후렴 가사다. 문득 그의 노래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사는 우리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밤이다. ‘저녁의 제국이 모래로 돌아가버렸음’을 우리 모두가 누누이 전하고 있건만 비몽사몽 약에 취해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도 밥 딜런을 보내고 싶은 밤이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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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