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총선이 끝난 후 처음으로 시평을 쓴다. 먼저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진보개혁 세력을 응원하고 지지한 분들에게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것은 지도력과 전략 부재에 기인한 것이지만, 난맥상을 드러낸 공천에도 명백한 책임이 있으며, 이에 대해 나 역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총선 결과가 나온 직후 떠올랐던 이들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해 파업 중인 방송가 후배들이었다. 총선 결과가 달랐더라면 새로운 변화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여의도 벚꽃들이 춤추며 날리는데, 방송 현장이 아닌 파업 현장을 지켜야 하는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고 시려온다.


총선 결과에서 더없이 아쉬운 것은 여권의 과반 달성이 주는 함의다. 총선에 부여된 역사적 과제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할 진보적 입법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의 마련이었다. 새누리당 역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내세웠지만, 대선마저 승리한다면 재벌개혁과 재정개혁은 찻잔 속의 미풍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뿐만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풀기 위한 노동시장개혁,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검찰개혁,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송·통신개혁도 그 미래가 이제는 불투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총선 좌담회에 참석한 최정표, 도정일 , 김호기, 윤평중 교수 I 출처:경향DB

안타까운 것은 분명한 패배인데도 불구하고 야권이 패배한 것만은 아니라는 논리로 총선을 평가하려는 일각의 흐름이다. 총선의 평가 기준은 2008년 총선 결과가 아니라 총선의 전초전인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야권에 대해 높은 지지를 보여준 민심이 돼야 한다. 결과를 결과로써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그 결과가 개별 정치세력에 주는 정치적 함의를 고려해 해석하려는 것은 유권자들을 두 번 실망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총선 이후 진행되는 노선 논쟁이다. 한편에선 총선 실패가 ‘좌클릭’에 따른 중도 세력의 이탈에 있기 때문에 중도강화를 강조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진보강화를 제시한다. 나 역시 총선 평가토론에서 중도층의 이탈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좌클릭을 일방적으로 비판한 건 아니었다. 민주통합당의 노선에 대해선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시각을 구별해야 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민주통합당의 좌클릭은 우리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부조응 관계를 고려할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민주통합당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내걸음으로써 시민사회의 이념구도에 제대로 대응하는 진보와 중도를 포괄하는 ‘중도진보’ 정당으로서의 자리매김을 이제서야 했다고 봐야 한다.

미시적 시각에서 민주통합당이 잘못한 것은 진보세력을 결집하는 ‘갈라치기’(칼 로브)와 중도세력을 설득하는 중간층 ‘끌어안기’(딕 모리스)를 결합했어야 하는 전략의 부재에 있는 것이지, 당의 정체성을 좌클릭한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를 거치면서 민주통합당은 모호한 중도개혁 정당에서 분명한 중도진보 정당으로 거듭났다.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을 위한 정당이라는 정치적 정체성을 명확히 하되, 시민 다수가 공감할 구체적 정책대안 제시라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 이중과제는 중도진보를 지향하는 정당에는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고 봐야 한다.

총선이 끝난 며칠 후 저녁 늦게 신문사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총선 결과가 1987년 대선 결과와 비슷한 느낌을 안겨준다고 말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 또한 컸기 때문이리라. 집으로 가기 전, 혼자 경희궁에 잠시 들렀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벚꽃들이 춤추며 날리고 있었다. “꽃이 피면 같이 웃자던 알뜰한 그 맹세”, 옛가요 ‘봄날은 간다’의 한 구절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그래, 봄날이 이렇게 지나가더라도 그래도 기운을 내야 한다고, 기운을 내기 위해선 제대로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무심히 날리는 벚꽃 그늘 아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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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