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 거제도 가는 길. 고등학교 시절 부산에서 쾌속선 돌핀호를 타고 여행했던 기억과 함께 포로수용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눈 맑은 시인의 그 커다란 눈동자에도 이 풍경들이 다 담겼을까. 그는 오늘의 나처럼 여유로운 꽃산행객이 아니라 포로의 신분이었다. 그것도 이 섬에서 몇 개월 머무르다 이내 부산의 거제리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동해야 했던 운명이었다. 얼핏 스치는 이정표가 차창을 때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잔존기념물. 날카로운 화살표 옆으로 ‘잔존’이라는 단어가 생경하다. 포로들은 오래전 여기를 떠났지만 그 흔적은 이렇게 생생하게 잔존하는 것인가. 언젠가 포로수용소에 생존하는 식물상을 직접 조사해 보리라 마음먹고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이번에 목적한 곳은 비상하는 꾀꼬리를 닮았다는 앵산이다. 그 이름을 입안에 넣고 한번 더 굴려보지 않을 수 없는 앵산. 이름이 이리도 강력하니 철이 다소 이르긴 하지만 땅심이 대단하여 봄꽃이 혹 엄동설한의 찬 기운을 뚫고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기대가 꽃의 의욕을 너무 앞지른 게 아닌가 했더니, 어라, 노란 복수초가 여러 촉 환히 피어 있지 않은가. 가장 먼저 접촉하는 정유년의 봄꽃. 내 볼에 훅 그대로 곤지처럼 들러붙는 듯 반갑기 그지없다. 변산바람꽃도 보았더라면 주체 못할 희열로 얼굴이 많이 씰룩거렸겠지만 이만해도 어딘가. 뜻밖의 봄꽃으로 몸안이 아연 환해졌다.

그래도 조금 아쉬워 허전한 시선을 거두려는 참인데 너덜겅을 배경으로 일군의 나무가 눈으로 들어왔다. 보통 산에서 흔한 나무이긴 하지만 이렇게 집단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은 비목나무였다. 비목나무는 수피가 조금 지저분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른 봄에 종알종알 피는 꽃은 그 향이 은은하고 은근해서 발길을 붙든다. 이름에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비목나무는 어느 산을 간들 으레 한두 그루는 만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앵산의 비목나무, 어쩌면 시인 김수영의 시선도 묵묵히 받아내었을 바로 거제도의 저 비목나무도 함께 생각하기로 했다. 비목나무, 녹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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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