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연무읍 들 동네의 초가는 환기구 같은 작은 창이 하나 있었는데 북향이었다. 바느질하던 어머니는 한겨울에도 곧잘 짜증스럽게 창호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강경으로 이사한 다음에 쓰던 방 역시 햇빛은 잘 들지 않았다. 한낮에 형광등을 켜놓고 책을 읽다가 전기료를 아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지청구 들은 적이 많았다. 비현실적인 자의식이 자라기 좋은 방이었다. 황홀한 젊은 날의 빛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그 어두운 방에서 나는 우울의 숙주를 키워 내 영혼의 심지로 삼았다.

나의 소원은 더 밝은 곳으로 가는 일이었다. 나는 자나 깨나 넓고 밝은 터로 가고 싶었다. 속 좁은 사람이 된 게 모두 어두운 방 때문인 것 같았다. 좁은 들길-신작로-포장도로-하이웨이를 따라 대도시 서울로 살림터를 옮겼다. 보편적인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방살이 내내 좁고 어두운 방을 면하지는 못했다. 나는 보다 밝은 중심을 향한 원심력을 내 삶의 동력으로 삼았다. 동굴 속 같은 방으로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집’을 지은 지 벌써 30여년. 내 문패가 달릴 번듯한 집 한 채 짓고 싶었던 것은 서울로 옮긴 후의 오랜 꿈이었다. 나는 설계사에게 주문했다. “무조건 모든 방에 햇빛이 쫙 들게 해주세요.” 설계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크룸’도 있어야 쉴 수 있다고 했다. “필요 없어요. 내 아이들을 창 넓은 방에서 살게 하고 싶어요.”

그러나 나의 자의식이 빚어낸 꿈은 별로 효용성이 없었다. 아이들은 내 소망과 달리 한낮에도 주로 커튼을 치고 지냈다. “밝으면 집중이 안돼서 그래요.” 아이들은 말했다. 그제야 오랜 나의 우울이 창 없는 방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방이 싫어 많은 날들을 세상의 들판을 향해 열심히 걸어왔는데, 그것으로 자의식의 어두운 방에서 내가 자유로워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아팠다.

1992년 섣달, 나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용인의 외딴집으로 혼자 들어갔다. 데뷔하고 20년 만의 일이었다. 구심력을 내 삶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은 셈이었다. 쉽진 않았다. 세상의 트렌드를 거슬러 가는 길이었으므로 처음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조립식인 ‘용인집’ 거실엔 서쪽과 동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서쪽 창으론 자궁 속 같은 첩첩산중이 보였고 동쪽 창으론 불 밝은 도시로 이어진 포장도로가 보였다. 나는 서창-동창을 번갈아 내다보면서 종종 눈시울을 붉혔다. 구심력의 끝에 놓인 밀실과 원심력을 쫓아가는 광장 사이에서 나는 자주 몸이 찢어졌다. 평생 그래온 것 같았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십 수 년 후, 논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나는 고향마을 앞의 벌판을 떠올렸다. 가을이면 논 가운데 짚단들을 높이 쌓아놓는 것이 그 무렵의 풍습이었다. 나락이 익어갈 때의 벌판은 풍요롭기 그지없었으나 정작 그 사이에 놓인 어린 내 실존은 늘 배가 고프고 등이 시렸다. 광장에서의 삶이 매양 그렇다는 걸 그때는 물론 눈치채지 못했다. 떠나고 싶었던 것은 그러므로 상대적 결핍으로 고단했던 나의 실존이 가리켜준 맹목의 방향이었다. 그 옛날 내가 정작 자주 쉰 곳은 짚단더미 속의 아늑한 동굴이었다. 그 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달게 잠든 적도 많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먼저 떠올린 게 바로 그 짚단더미 속 동굴이었다. 그곳이야말로 어린 내게 유일한 ‘비밀’ 유일한 ‘밀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고향 들판에 그런 짚단더미는 남아 있지 않았다. 들쥐조차 들어갈 수 없도록 질긴 비닐로 포장된 짚단들이 몇 만 원짜리라는 패찰을 두르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 여기저기 나뉘어 놓여 있는 걸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깨달았다. 도시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짚단더미 속 나의 아늑했던 밀실은 완전히 해체, 이제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반세기의 삶은, 우리들 모두가 협력함으로써 날로 공고해져온 자본의 구조화를 통해 개개인의 ‘비밀’과 ‘밀실’이 낱낱이 까발려져 훼손되는 잔인한 과정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위아래 할 것 없이 세일즈맨이 되어 전보다 부자는 되었다지만, 비밀이 없고 밀실이 없는 세상에서 불러진 배를 과연 어디에 누일 것인가.

충남 논산 명재고택 (출처 : 경향DB)


세월호 이후 나는 새 소설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자살률 세계 제일의 나라, 변방까지 시시각각 미치는 생산성 중심의 정치-사회-문화적 구조를 방어하지 못해 어디에 살든 나날이 불안한 환경에서, 끝내 바다에서 건져내지 못한 선생님과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소설은 써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월호뿐인가. 날이 새면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뉴스를 들어야 하는바, 내 정서의 한가닥일망정 사과 씨처럼, 비밀의 방에 가두어놓을 재간이 없었다.

“모든 지도(direction)는 방향전환(re-direction)이다.”

존 듀이의 말이다.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하면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삶의 주인인 각자가 지켜야 할 소중한 윤리성이거니와, 잘못된 우리의 방향을 용기 있게 바꿔가도록 선도하는 게 또한 지도력의 귀한 덕목일 터이다. 아직도 필요한 게 우수한 세일즈맨인가. 지배력을 강화하는 전략가인가. 빚을 아무리 져도 GDP만 올리면 된다는, 사회적 불안을 명분으로 모두를 일사불란하게 줄 세우면 된다는 식으로는 행복해질 방법이 없다.

이를테면 어제도 나는 “취임하자마자 41조원 규모의 재정정책을 과감히 내놓아…. 재·보궐선거에서 재미를 좀 봤다”는 부총리의 말씀을 들었고, 오늘도 나는 ‘사이버망명’을 야기한 ‘카톡사찰’ 파동을 넘어 수사기관이 휴대전화 감청을 좀 더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관련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뉴스를 듣는다. 아무런 비밀, 아무런 개인의 밀실도 없는 세상은 다만 황막할 뿐이다. 생산성을 위한 소프트웨어로서의 정책-전략이 아니라,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하드웨어로서의 참된 방향을 가리키는 지도자의 큰 손가락을 보고 싶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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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