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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책을 이야기했는데, 사라질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책도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그런 책이다.

먼저 책 제목부터 보자. 이 책 제목은 오주, 연문, 장전, 산고로 읽어야 한다. ‘오주’란 사람이 연문하여, 즉 문장을 부연하여, 장전, 곧 긴 부전지(附箋紙, 쪽지)를 붙인, 산고, 곧 이런저런 글이란 뜻이다. 내친김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읽어보자. 이건 ‘왕, 오천축국, 전’이다. 다섯 천축국에 간 기록이란 뜻이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오주’는 누구인가.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다. 이규경이라면 대부분 모를 터이다. 하지만 이덕무(李德懋)의 손자라면 알 것이다. 이덕무는 요즘 ‘책 읽는 바보’로 잘 알려져 초등학생도 다 안다. 이덕무는 알다시피 18세기 후반의 인물로 박지원 그룹의 일원이다. 비록 서파(庶派)여서 관료로 출세는 할 수 없었지만, 서울의 양반사회에서 단정한 처신과 빼어난 문학적 역량으로 유명했고, 정조까지 알아주어 규장각에서 검서관(檢書官)으로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었다. 규장각의 벼슬은 정조 당시 최고로 명예로운 것이었다. 검서관이 잡직관(雜職官)이기는 하지만 역시 최고의 인재를 뽑았다.

이덕무는 치밀한 관찰에서 오는 탁월한 묘사와 섬세한 감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한문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박학으로도 당대에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산문과 박학은 누가 계승했던가? 아들 이광규(李光葵)인가. 이광규 역시 아버지를 이어 검서관을 지냈지만 문학과 학문에 성과를 올린 것 같지는 않다. 그에 관한 기록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광규의 아들, 곧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이 조부의 박학을 계승했다. 산문은 천품이 모자랐던 것인지 소식이 없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가능한 박학 쪽으로 이덕무를 계승한 증거가 바로 <오주연문장전산고>인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60권 60책의 필사본으로 천지편·인사편·경사편(經史篇)·시문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 곧 항목은 1417개다. 물론 이 책은 온전히 남은 것이 아니다.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상당 부분 망실되었으니, 이규경은 쉽게 말해 평생 1471편을 훨씬 넘는 논문을 쓴 것이다.

이 책의 맨 앞에 실린 글을 보자. ‘십이중천변증설(十二重天辨證說)’이다. ‘십이중천’은 조선후기에 한역 서양서를 통해 소개된, 우주가 모두 12겹으로 되어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구조를 말한다. <십이중천변증설>은 12중천설과 관련된 여러 문헌을 소개하고 그것의 타당성을 따지는 글이다. 이 형식 곧 ‘변증설’은 이 책 전체를 일관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변증설’이란 글 141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곧 ‘변증설’의 집합인 것이다. ‘변증’이란 따지고 증거를 들이댄다는 뜻이다. 아주 좋게 평가한다면 요즘의 논문인 것이다. 예컨대 ‘서사변증설(書肆辨證說)’이란 글을 보자. 서사는 서점이다. 서점이 무엇인지, 조선에 서점이 언제 출현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없어졌는지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 자신이 당대에 인지하거나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주제를 변증의 방식으로 다룬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자료를 다량 포함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金正浩), 19세기 최고의 학자인 최한기(崔漢綺) 등에 대한 정보 역시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19세기 중반까지 북경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최신의 서양지식을 온전히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없는 지식을 조직한 것일 뿐이라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문적 방식과 주제 설정의 독특함,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정보는 결코 평가절하될 것이 아니다. 이런 박물학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은 조선조의 전통에서 극히 희귀한 것이다. 알다시피 조선조의 주류 학문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이 다루는 학문 영역은 방대하다. 그것은 인간의 저 미묘한 심성부터 윤리학, 예술학, 문학, 정치학, 경제학, 자연학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포괄한다.

하지만 그것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이·기·심·성 등 지극히 추상적 언어로 이루어지는 관념학이다. 자연과 사물, 사회, 문화의 구체성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에 반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바로 그 구체성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규경 역시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의 학문’(名物度數之學)은 ‘성명(性命)과 의리를 주제로 하는 학문’(性命義理之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명물과 도수의 학문’은 18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 중국에서 전래된 고증학풍과 서양학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이 책을 논할 수 없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쓸 때의 이규경을 상상해 보자. 일생의 시간은 거의 책 읽기에 소모했을 것이다. 친구와 어울려 술을 먹고 꽃놀이를 다니고 시를 짓고 엽관운동을 하는 일은 아마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늘 ‘변증설’의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것이 일이었을 것이다. 자료를 찾고 읽고 분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원고를 쓰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없는 책을 빌리려 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고단한 학자의 길을 외롭게 걸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원래 이 책이 사라질 뻔했다가 다시 살아났고 그 뒤 원본이 사라지고 사본만 남게 된 사연 등을 말하려 했는데, 책을 소개하느라 정작 그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원고를 달리 해서 말하는 수밖에!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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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