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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피 마른 지 엊그제 같던 아이가 비 맞은 죽순처럼 쑥쑥 자라기 시작할 무렵, 어느 여름휴가에 남해 금산에 가 본 적이 있다. 기도의 영험함이 유별하다는 보리암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본 뒤 정상에 올라 일망무제의 바다를 바라볼 때, 그다지 안목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눈앞의 풍경이 거대한 무대처럼 느껴지더니 이내 저 휘장 너머의 외부로 건너가고 싶다는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나의 나머지 일생이 그저 요만한 크기와 넓이로 굴러가겠거니 가늠되던 시절에 만났던 그 호쾌하고도 아련한 장면은 짧은 순간이나마 답답한 마음에 큰 구멍 하나를 뚫어주었다. 그때 나란히 앞을 바라보던 어느 분의 한마디가 바람소리를 비집고 쏙 들어왔다. 굳이 나를 겨냥한 말은 아니었지만 쪼잔한 가장의 심사에 궁합을 꿰맞춘 말이라서 귀에 정확히 꽂힌 것이었다. “여행이라고 굳이 외국에 나갈 일이 아니라니까요!”

세월이 흘러 아이는 대나무처럼 훌쩍 자랐고 나는 제법 늙었다. 시골에서 뛰놀던 산과 들에서 학창 시절의 운동장으로, 그리고 사무실의 좁장한 책상으로 나의 공간이 팍 쪼그라들었다. 그때의 예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행로 끝의 결과였다. 어느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오르다가 비상구라도 만난 듯 오늘은 그나마 이렇게 남해 금산의 한 골짜기를 더듬는다. 발밑을 두리번거리지만 날씨는 쉬 풀리지 않아 제비꽃, 양지꽃을 겨우 건졌다.

그런 와중에 큼지막한 돌들이 함부로 나뒹구는 계곡의 가장자리에서 눈을 씻어주는 나무가 있었다. 바닷가에 주로 사는 사스레피나무였다. 노란 생강나무 곁에서 잎만 무성한 줄로 알았더니 가지 밑으로 꽃들이 한창이었다.

꽃이라면 으레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나무를 대표한다는 기분으로 얼굴을 빳빳하게 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어쩐지 사스레피나무의 그것은 잎겨드랑이마다 종 모양으로 아래를 향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아주 야무진 인상의 사스레피나무. 잎은 동백처럼 두껍고, 가장자리마다 톱니가 발달했다. 손가락 끝으로 한 바퀴 휙 어루만지면 꿀꿀하던 기분까지도 알싸하게 확 변화시키는 나무, 사스레피나무, 차나무과의 상록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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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