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펄, 펄, 펄 내리기 시작했다. 뜻밖의 눈사태. 공중을 살피니 쉽게 그칠 눈은 아니었다. 꾸물꾸물한 기세에 발길을 돌리려다 이런 날이 아니면 언제 오리무중의 산중을 헤매겠더냐. 희방사 부도탑을 지나는데 눈 사이로 지상의 모든 소리가 꼬리를 감추어 적막만이 탑처럼 우뚝 섰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조성모의 노래, <가시나무>의 첫 소절이다. 평지를 걸을 땐 몰랐는데 가파른 깔딱고개를 오르자니 어느새 그가 또 나타났다. 헉, 헉, 헉 숨소리. 등 뒤에서 누가 따라붙었나 돌아보면 어느 새 가슴을 빠져나간다. 내 속에는 정말 나도 모르는 이가 살고 있는가 보다. 사타구니에서 걸음을 자꾸 꺼내면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듯, 이 과격한 자를 쫓아내면 그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처음 오르는 산이 아니었지만 눈 속의 소백산은 새로운 산이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길을 어림으로 짚으며 무사히 연화봉대피소에 도착했다. 하늘에 무슨 벽이라도 있는가. 딱, 딱, 딱 공중에 튕겨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밤을 건넜다. 또 하루 늙은 몸으로 연화봉-비로봉-천동계곡으로 하산하는 길. 인간들의 등산로를 가로질러 눈밭으로 걸어간 어느 짐승의 발자국이 뚜렷하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어제의 노래를 다시 꺼내어 흥얼거리다가 어느덧 다래교에 도착했다. 꽃이 사라진 이 산중에서 내내 겨냥했던 나무가 멀리 보였다. 가시나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노래 속의 가시나무는 가시가 많은 나무를 통칭하는 것이지만 실제 참나무과의 가시나무도 있다. 하지만 남쪽 해안이나 제주도에서만 드물게 자생한다.

발길을 멈추고 오래 바라본 나무는 산개벚지나무다. 작년 5월에 왔을 때 인사를 나누었던 나무. 다닥다닥 달리는 흰 꽃도 꽃이지만 오늘 이 나무의 특징은 단연 수피다. 슬픔의 울혈처럼 피가 배어나오는 듯, 칭칭 감은 붕대 사이로 푸른 멍자국이 보이는 듯한 나무의 껍질. 지금은 겨울이라 그 느낌이 더욱 강했지만 산개벚지나무는 찬 기운을 뚫고 하늘로 ‘짱짱히’ 걸어가고 있었다. 산개벚지나무, 장미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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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