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만 젖히는 것과 등을 땅에 대고 보는 밤하늘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이다. 짐승처럼 웅크린 바위에 배낭을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검은 밤이 가슴을 내리눌렀지만 코끝을 바짝 스치는 흐뭇한 별빛이 그 압박을 풀어주었다. 눈으로 마구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이 별빛 중에는 저 북두칠성, 저 오리온자리에서 내려온 것들도 분명 섞여 있을 터!

소청을 나설 때 깜깜하던 어둠이 어느새 환하다. 희운각에서 누룽지와 인절미로 아침을 때운 뒤 마침내 공룡능선을 더위잡았다. 살아 있는 공룡을 한 번도 본 적은 없다만 이름과 실질이 딱 어울리는 지형이 아닐 수 없다. 공룡이라는 명칭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말로도 대체 불가능한 공룡능선. 작년 가을에 왔을 땐, 공룡의 비늘 같은 바위틈에서 많은 꽃들을 만났지만 이제 모두 자취를 감추고 열매조차 흩어지고 흔적만이 남았다. 그중에서 저무는 가을을 가냘프게 감당하는 꽃이 있으니 산오이풀이다. 꽃은 대부분 반토막이 났지만 오늘까지 그런대로 허술한 모양을 유지하면서 내 허전한 시선을 받쳐주는 게 대견하고 고맙다. 산의 높은 곳에서 자라기에 이렇게 늦게까지 이 자세를 유지하는가.

마등령에 서면 발밑에서 내 빠져나온 그림자가 아득한 선계로 들어가는 열쇠구멍인 듯 낯설다. 언제 또 여기에 올 수 있을까. 시간과 무릎을 걱정하면서 아래를 향해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상강 이후 정상 부근에서 몰락하더니 금강굴 부근에서 제대로 다시 부활한 단풍. 비선대 계곡 다리 옆 나무가 이런 팻말을 달고 있다. “당단풍나무. 가을에 붉은색으로 변하는 데서 유래되었고 설탕 당이냐 당나라 당이냐 유래가 확실하지 않다.” 저 훤칠한 나무를 두고 하필이면 저런 설명뿐일까. 웃음이 슬며시 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왔던 설악산 비선대. 그때의 까만 교복에 검은 모자 눌러쓴 까까머리의 나하고 지금의 나는 같은 나일까. 늙으면 이렇게 늙으라는 듯 소박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설악산 공룡능선의 산오이풀을 생각하면서 어둠 속으로 점점 희미해지는 그림자를 앞세우고 속초 외옹치항으로 향했다. 산오이풀,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일반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매나무  (0) 2017.11.22
갈대  (0) 2017.11.14
산오이풀  (0) 2017.11.07
기름나물  (0) 2017.10.31
겨우살이  (0) 2017.10.24
참회나무  (0) 2017.10.1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