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

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에 들어선다 우는 아이의 입엔 뼈가 물려 있다

1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언덕을 오른다 노파의 몸을 박차고 나온 뼈들이 경쾌한 음을 내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노파의 발걸음이 거벼워진다 유모차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고 노파는 생각한다

3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상점 거리를 걷는다 쇼윈도우에 노파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목 없는 마네킹 위로 노파의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진다 그 시간 악기점 주인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손가락은 몸의 구멍을 막느라고 분주하다

4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집을 나선다 이곳엔 마땅히 벽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벽이다

45분 전, 테이블 위에는 자궁처럼 부푼 빵이 놓여 있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시간은 여전히 창틀을 넘어가고 있다     

- 안희연(1986~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노파는 아직도 산책 중이야. 오늘은 늘 다니던 산책로를 살짝 벗어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로 가본 거야. 45분 후에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듯이. 목숨이 몸에서 빠져나와 길가에 굴러떨어지고 벤치에 담겨져도 노파는 느끼지 못했을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공원은 한산하고 호젓하니까. 나뭇잎 지던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졌을 뿐이니까. “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고 말할 때, 생명을 치워버려야 할 물건처럼 말할 때,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안심하라는 듯 말할 때, 타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모두가 바빠서 주위를 돌아볼 틈도 죽을 틈도 없다. 이 시는 현상에 감춰진 사건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복기해 본다. 한 물건이 생명이었던 때를 상상해 본다. 죽었는지도 모르는 한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것, 그것이 시가 애도하는 방법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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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