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짐 가방이 부서진 적이 있다. 손잡이가 떨어질 듯 위태로워서, 어떻게든 다음 행선지로 밀고 가기는 해야겠는데, 불안감 때문에 진땀을 흘렸다. 왜 나는 미련하게 여행지에서 기념품들을 사 모았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 무거운 책들을 어떻게 다 담았는지. 하나하나 소중하다고 여겼던 물건들이 근심거리가 되었다. 가방이 짐 무게를 이기지 못할 것을 어느 정도 예측했으면서도 순간의 소유 발심이 그걸 모른 체했다. 결국 여행지에서 다급하게 가방을 샀고, 부서진 가방은 호텔 방에 두고 왔다.

이번에 그때 얻은 새 가방으로 떠날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여행 기간에 짐은 줄이고 아름다운 물건들은 눈과 마음에 많이 담아두되 가방에는 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다. 가방의 교훈이 아직 식지 않은 것이다.

여행 가방 일화가 내 삶의 비유 같다. 삶의 모든 소유물을 끌어안고 가려면 가방은 터져버릴 것이다. 어차피 다 갖고 갈 수도 없다. 여행길에서 벌어지는, 감성 충만하거나 공포스럽거나 자유롭거나 외롭거나 하는 변수 많은 온갖 일로써 얻는 것은 소유물로 남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로 겪는 것이다.       

어떤 두려움을 피하려고 한다면 여행을 떠나지 않는 것이 답이겠지만 두려움 뒷면의 호기심은, 그 여행의 매혹은 피할 수 없다. 사실 삶이라는 여행에서 난 이미 길 위에 놓여 있다. 떠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삶은 여행이라는 꽤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사실은 여행은 떠나기 전에 삶을 바꾼다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사무실에는 여름 휴가 일정표가 나왔다. 누군가는 모아놓은 휴가일을 써서 저 멀리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듯하고 누구는 절대적으로 방 안에만 있겠다는 마음도 표출한다.

난도 높은 출간 작업, 잘 팔리지 않는 신간에 대한 근심 때문에 편집 회의며 마케팅 회의엔 모두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으로 앉아 있지만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나면 현실을 견디는 일이 훨씬 수월하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위해 여행서 두 권을 샀다. 한 권을 사는 건 내겐 위험한 일이다. 정서적으로 한 권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이다.        

두 권을 번갈아 읽으며 마음의 답사를 시작했다. 교차해서 읽으니 여행지 정보도 선명해지고 해당 책의 저자나 편집자가 방점을 찍은 이미지나 소개 글의 미세한 차이도 흥미롭다.

내가 정작 시간이나 동선 때문에 볼 수 없을 것 같은 여행지에도 이미 발 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 고된 생활 중에도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삶의 무게도 그만큼 가벼워진다. 조금 언짢은 일쯤은 뭐 어때, 하면서 털어내는 일도 쉽다. 가보기 전에, 혹은 갈 수 없는 여행지도 여행서로 떠나보는 맛은 상당히 감친다. 눈으로 밟는 여행지라는 게 직접 다니는 것처럼 신날 때도 있으니.

여행서를 읽다가 어느새 <여행자 나무>란 시집을 꺼내 또 읽기 시작한다. ‘여행’이란 말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지친 듯 쓰러질 듯 한 사람이 멀리서 왔다/ 딱 하루만 폈다 지는 꽃의 넋과 만나려고/ 선연하게 둘러앉는 두레의 그늘, 석양이 지고 있다./ 창밖으로 보면 오늘의 여행자는 홀로 서서 고즈넉하고/ 나무 또한 그가 버리고 갈 길에는 무심하지만/ 펼쳐든 여정이라면 누구라도/ 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행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어제가 포개놓은 그늘에 서게 하는 걸까?”(김명인 시 <여행자 나무> 중에서)

시인이 묻는다. 접을 수 없는 여정, 이미 펼쳐진 여정 속에서 오늘의 여행자는 ‘어제가 포개놓은 그늘’에 설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이 질문은 여행서를 읽을 때와는 다른 서늘한 마음으로 여행이 다가온다. 성큼성큼 내딛던 발길을 시집을 읽으며 멈췄다. 어제의 그늘에 서 있는, 고즈넉한 오늘의 여행자가 그려졌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눈은 어제를 모두 삭제한 데에서 뜨이는 게 아닐 것이다. 어떤 삶의 그늘에서 반짝하고 발견되는 것이겠지.      

오늘 고단한 생활 속에서 낯선 곳의 여행자인 나를 상상하며 가벼워지듯이 여행지에선 오늘의 이 고단한 삶의 그늘이 새로움을 발견할 동력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여행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늘의 여행자’가 되려면 명심할 것이 있다. ‘그가 버리고 갈 길에는 무심한’ 나무 앞에서 ‘어제가 포개놓은 그늘’을 동력 삼아 새로움을 얻는 것. 물건들로 가방이 터져나가지 않게 많이 보고 덜 사는 것.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