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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이 횡행한다. 그러잖아도 별별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사회인데, 탄핵정국이 되니 거짓 이야기들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최순실의 태블릿PC가 조작이고, 모든 것은 고영태의 음모에서 비롯되었으며, 야당과 좌파들의 계략 때문이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조기를 자유민주의 상징인 양 흔들고 “군대여 일어나라”고 외치는 지경에 이르면 침착한 나도 어안이 벙벙하다. 탄핵반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이런 거짓말들을 어디까지 믿고 안 믿는지 확인할 도리는 없으나, 단체대화방을 통해 매일처럼 이런 이야기가 오가니 안 믿던 사람들도 혹시나 하고 빠져들기 십상이다.

한편으론 이런 사람들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지상파나 케이블TV의 조작된 뉴스와 교묘한 논리들에 질렸거나 전문가 엘리트의 헛소리에 지친 사람들이 건강한 정보유통 채널조차 믿지 않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믿으라는 것만 믿는 데는 도가 튼 보수기독교인들이 시청 앞 광장에 특히 많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무릇 음모론은 지성이 쫓겨난 자리에서 자라는 법이다.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고 고민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음모론은 내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는 좋은 신념체계다. 우치다 다쓰루는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음모론은 의외로 정보가 부족한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보다는 정보가 넘치는 탓에, 그리고 그것들을 잘못 취사선택하여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데서 음모론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곰곰이 따져보니 정말 옳은 말이다. 민족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를 민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환빠’며, 진화의 밝혀지지 않은 고리를 창조의 온갖 증거로 채워 넣는 ‘창조과학’이 어디 정보가 부족해서 만들어진 신념일까. 우치다는 그래서 음모론의 특징으로 무시간성과 사회적 승인의 무시를 든다. 음모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잘못이 드러날 가능성을 처음부터 무시하며, 사회적 승인과 수용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진실을 확정해놓고 시작한다.

나는 요즘 읽는 책에서 공교롭게도 음모론에 맞설 만한 태도들을 연거푸 만났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인 <메논>을 읽는데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소크라테스에게 배움을 구하던 메논은 인간의 탁월함(arete)에 대한 끈질긴 논쟁 끝에 소크라테스로부터 허무한 소리를 듣는다.

메논: 지금 저로서는 정말 영혼도 입도 다 마비되어 선생님께 무슨 대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수만 번이나 사람들에게 탁월함에 대해 말을 해왔고, 그것도 훌륭하게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여보게, 내가 그 답을 알면서 다른 사람을 난관에 빠뜨리려는 게 아닐세. 누구보다 나 자신이 혼란에 빠져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역시 난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지. ‘탁월함’ 그것이 무엇인지 사실은 나 자신도 모르거든.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을 톡톡 쏜다고 하여 메논이 ‘전기가오리’라는 별명을 붙여준 그 유명한 장면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메논의 황당해하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공자의 제자 자공도 스승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끊었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었고, 기필코 하려는 바가 없었으며, 고집하는 바가 없었고, 자기를 내세움이 없었다.” 이것은 공자의 겸손함을 평하는 말이 아니다. 도대체 공자가 무슨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그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 현대에는 칼 포퍼가 있다. 그는 <추측과 반박>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과학적 설명이란 미지의 것을 기지(旣知)의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이처럼 진실이 아닌 것도 없다. 과학적 설명이란 그와 반대로 기지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지성’이란 많이 알거나 배운 데서 만들어지는 게 아님을 또 한 번 확인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락한 엘리트, 전문가들을 혐오한 나머지 아예 지성 자체를 기피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많이 배운 엘리트가 곧 지성은 아니요, 따라서 반엘리트주의가 반지성주의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지성은 ‘모른다’고 용기 있게 고백하는 데서 출발한다.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 믿음을 섣불리 내세우기보다 진실을 기다리고 탐구하는 자세 말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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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